(데미안) 가장 불완전한 스승
《창작》 헤세와 피스토리우스의 만남
(데미안. 민음사)
그날도 헤세는 작은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스위스 시골, 낡은 집은 전쟁의 소음이 멀리서만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요하지만 무거운 곳이었다.
저녁 종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소리는 늘 그렇듯 그의 가슴에 작은 균열을 냈다.
‘왜 저 종소리는 이렇게 확신에 차 있을까.’
사람들은 그것이 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말하지만, 헤세에게는 오히려 신을 가두는 쇠사슬처럼 들렸다.
어린 시절 마울브론 신학교의 예배당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
부모님의 피에티즘은 종소리처럼 단단하고 차갑고 틀림없었다. 죄는 벌 받아야 하고, 구원은 오직 빛의 길로만 온다고.
그러나 인간은 빛만으로 살 수 있는가? 어둠을 품지 않고 어떻게 빛을 알 수 있는가?
그는 수없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의심하지 마라. 믿어라.”
믿음이라는 안전지대 안에 갇힌 사람들은 정말 신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덮은 것일까.
그는 창문을 열었다. 멀리서 오르간 연습 소리가 흘러왔다. 누군가 바흐를 치고 있었다. 아마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일 터. 젊지만 이미 늙어 보이는 얼굴.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격. 못생기고 거칠었지만, 눈과 이마에만 남성다운 강함이 모여 있었다. 입 주위는 부드럽고 아이 같았고, 턱은 우유부단한 소년처럼 여렸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는 자부심과 적의가 뒤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호감을 주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그 얼굴이 선명해졌다. p132
오르간 선율에 맞춰 건물 전체가 숨 쉬는 듯했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아름다움에조차 불편함을 느꼈다. 고통도, 혼란도, 스스로를 의심하는 흔적도 없는 완벽한 형식. 마치 교회의 교리처럼.
며칠이 지나고, 미사 후 홀로 남아 연주하던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바흐를 그렇게 치시다니…
신에게 닿는 기분이시겠군요.”
연주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악은 신의 언어입니다. 말보다 순수하죠.”
그 말은 옳았지만, 헤세의 가슴은 공허했다.
그날 밤 그는 노트를 펼쳤다.
“나는 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신을 갈망하는 인간을 쓰고 싶다.
종교인들은 신을 너무 작게 만들었고,
음악가들은 음악을 신처럼 만들었다.
결국 둘 다 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나의 질문이 인간의 형태를 입은 것이다.
내가 아직 답하지 못한 모든 것의 그림자이자, 언젠가 뛰어넘어야 할 모습이다.”
그는 노트에 ‘피스토리우스’라 적었다.
《감상》 그리고 몇 년 , 그 이름은 《데미안》 속에서 싱클레어의 스승으로 다시 태어났다.
싱클레어는 두세 번 시내를 오가는 길에 어느 교회의 자그마한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 소리를 들었다.
바흐의 연주가 들렸다. 극도로 개인적인 의지와 끈질김의 표현이어서 마치 기도처럼 들렸다. p130
그의 이름은 피스토리우스, 아버님은 설교사이고 그는 신학을 공부했으나 지금은 오르간 연주자였다.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는 싱클레어에게 가장 진부한 대화마저도 나직하고 꾸준한 망치질로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우리의 종교는 마치 그것이 종교가 아닌 것처럼 훈련받아. 종교가 인간 오성의 산물인 듯 취급되지.°°°사제란 개종 시키려고 하지 않아. 다만 신자들 가운데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 안에서 살려고 하지. 우리가 지금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우리의 새로운 신앙은 좋은 거지만 진정한 종교가 아니야. 그것은 공통의 것이 되어야 해. 예배와 도취, 축제와 비밀의식을 가져야 해".... p147
그는 사제가 되어 새로운 종교를 선포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시대의 종교적 질서를 인정하며 현실과 타협한다.
피스토리우스는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싱클레어에게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흔드는 힘으로 다가온다.
싱클레어는 말한다.
“나는 음악을 즐겨 듣습니다. 아주 절대적인 음악, 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을 흔들고 있다고 느껴지는 음악요. 음악이 정말 좋아요. 음악은 별로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도덕적이지요. 저는 도덕적이지 않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늘 도덕적인 것에 시달렸거든요. 저 자신을 잘 표현할 수가 없네요." p133
피스토리우스는 바흐의 곡들을 연주한다.
그리고 현대 음악인 레거의 곡도 연주했다.
그리고 싱클레어에게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들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바흐의 파사칼리아는 C Minor(도 단조).
바흐의 음악은 감정보다 질서와 구조가 먼저인 음악이다. 혼돈 속에서도 세계에는 신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수학적이고 엄격한 형식으로 보여준다.
개인의 고백보다는 보편적 세계관을 담고 있으며, 마음을 정화하고 안정시키지만, 그 고통과 긴장은 언제나 형식 안에 봉인된다. 폭발하기보다는 정돈되고, 무너지기보다는 질서 속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바흐는 무너지는 세계를 붙잡아 주는 음악이지, 기존 세계를 깨뜨리는 음악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피스토리우스의 한계와 동시에
그의 성격을 드러낸다.
싱클레어는 바흐와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었다. 피스토리우스처럼 ‘신의 질서’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음악이 가진 감정의 깊이 때문이었다.
막스레거의 파사칼리아 D Minor (레 단조)
막스 레거의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와 바로크 전통을 동시에 끌어안은 매우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데미안에서 피스토리우스가 바흐 다음으로 레거를 연주한 이유도 바로 이 전통과 현대적 확장의 특징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바로크, 고전 형식을 유지하지만, 화성이 매우 난해해서 때로는 무조성에 가까운 착각을 일으킨다. 바흐가 전통과 질서를 대표하는데 반해 레거는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의 혼란·현대적 고뇌·극단적 확장을 보여준다.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는 D Minor (레 단조)
북스테후데는 바흐보다 앞선 작곡가로, 교리적 체계가 굳어지기 전의 신비주의적 루터교 영성에 가깝다. 설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험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는 짧은 베이스 선율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 위에 변주가 층층이 쌓이는 구조를 가진다. 느리고 장중하다. 안쪽으로 내려가는 음악이다. 피스토리우스가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들려주겠다고 한 것은 질서를 버린 뒤에도 공허에 머무르지 말고 너의 가장 깊은 뿌리로 내려가라는 뜻이었다. “변하는 나” 아래에 항상 남아 있는 ‘변하지 않는 나’의 소리였다. 그것은 “아브락사스로 향하라”는 초대장과 같았다.
"마음이 짓눌릴 때면 피스토리우에게 전해 들은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 달라고 청했다. 그럴 때면 어두운 저녁 교회 안에서 나는 그 자체에 몰두하고,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는 이 기이하고 내밀한 음악에 몰입하여 앉아 있었다. 그 음악이 번번이 기분 좋았고 나로 하여금 더욱더 영혼의 목소리들을 인정할 준비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p146
"나는 다른 사제봉사를 하려 하네. 오르간 건반 위에서, 어쩌면 다른 곳에서. 그러나 나는 늘 무언가, 내가 아름답고 성스럽게 느끼는 것에 에워싸여 있어야 해. 오르간 음악과 비밀 의식이든, 상징과 신화든. 나는 그런 것이 필요해."p170
피스토리우스는 약점을 인정하고 교회 제단 위의 미사 대신, 오르간 건반 위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고, 신성한 것을 매개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제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 비밀의식이든, 상징이든 신화든 그가 떠날 수 없는 것이 그가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라고...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어렵다고, 그것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 어려움이라고 한다. 오로지 운명만을 원하는 자에게는 모범도, 이상도. 사랑스러운 것, 위로가 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혁명가가 되려 해서도 모범이 되려 해서도 순교자가 되려 해서도 안된다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의 이야기를 들은 싱클레어는 상상할 수는 없지만 꿈을 꾸기로 한다.
피스토리우스는 성직자이자 음악가로 등장하지만, 본질은 철학자에 가깝다.
그는 이집트 종교, 인도 사상, 아브락사스 같은 상징을 깊이 연구한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과거에 머문다. 질문을 하지만 세계를 새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아가리 닥치고 배 깔고 엎드려 생각하기”를 철학이라 말하는 그의 사유에는 한계가 있다.
기존 사상들을 깊이 이해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언어를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p150]
피스토리우스 말에 싱클레어는 깨닫는다. 그의 모습 안에 자신이 겹쳐 보였을 것이다.
"그의 이상에서는 '골동품 냄새가 났다.' 그는 과거를 향한 구도자였다.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길잡이인 자신도 넘어서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길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p166]
길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길을 직접 열지는 못하는 자, 피스토리우스는 완성된 철학자가 아니라 ‘과정 속의 철학자’였다.
그 깨달음의 울림이 싱클레어가 인도자라고 믿었던 피스토리우스를 떠나게 된다.
헤세는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말한다.
사유는 중요하다. 그러나 사유만으로는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피스토리우스는 헤세가 한때 머물렀던 자리이며, 싱클레어가 반드시 지나야 했던 자리이고, 독자가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자리이다. 당신은 지금도 피스토리우스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이미 그 너머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앞부분은 헤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적 재구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