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자신의 청소년기를 반영한 자서전적 소설"

by 설기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러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교장 선생은 힘주어 한스 손을 잡았다.

[민음사 수레바퀴 아래서 p.146]


헤르만 헤세가 서른 살에 발표한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 소년의 불행한 죽음을 다루지만,

그 비극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는다.


이 작품은 한 아이를 짓밟고 지나간

수레바퀴들의 정체를 하나씩 드러내는 소설이다.


한스 기벤라트는 자연을 사랑하던 아이였다.

낚시를 즐기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망둥이를 낚으면 기뻐했다.


경쟁보다 계절의 변화를 먼저 느끼고,

성과보다 감각에 가까운 아이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암시한다.

그런 아이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문제는 한스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가 너무 일찍,

너무 잘 달려야 했다는 점이다.



아버지

사랑 대신 기대를 건네는 존재

한스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시민 계급의 가장이다.

성실하지만 속물적이고,

자신의 삶에서 이미 사라진 감정과 가능성을

아들의 성공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그의 내면에는

자유로운 정신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아들에게 건넨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가문의 명예를 높여 주겠지?”

이 질문은 사랑의 부재를 가장한 요구다.

아들은 성과로서만 인정받는다.



사회

재능 있는 아이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길

슈바벤 지역에서 가난한 집안의

재능 있는 아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다.

시험, 암기, 경쟁.

재능은 보호받지 않는다.


오히려 집중적으로 소모된다.

탈락하면 낙오자가 되고,

통과하면 더 빠른 속도로 달려야 한다.



학교와 수도원

인간을 ‘유용성’으로 환원하는 장치

학교의 목적은 명확하다.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 잡은

자연의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

학교는 인간을 사회의 부속품으로 만든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의

야비한 명예심이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p.172)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제도는 늘 그렇게 작동한다.



하일러

다른 삶의 가능성

하일러는 공부하지 않아도 박식했고,

자기만의 언어와 사고를 가진 아이였다.

시를 쓰는 공상가이자 괴짜.

그는 한스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혹이었고,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체계는 그런 존재를 오래 두지 않는다.

하일러는 떠나버린다.

한스는 홀로 남았다.

아파서 수도원을 나온다.



엠마

“젊은 아가씨들과 사귄다는 것은

어쩐지 그에게 끔찍하게 여겨졌다.” (p.206)


엠마를 만나며 한스의 감각은 잠시 깨어난다.

엠마는 한스의 수줍음을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스는 오히려 더 움츠러든다.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가 건넨 과즙 잔 앞에서

한스의 심장은 뛰지만,

그 감각은 오래 허락되지 않는다.


엠마는 떠난다.


잠시 벗어난 수레바퀴

한스는 ‘주시험에 합격한 대장장이’가 되기로 한다.


힘든 노동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몸의 리듬을 회복한다.

동료들과 국도를 걸어가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다.



가파른 오솔길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는 길.

그 순간만큼은

한스가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검푸른 강물 위로 조용히 떠내려가는

한스의 모습이다.


“저 아이는 무척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어요.

그리고 일도 모두 잘 풀려나갔지요…

그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불행이 닥쳐온 겁니다.”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는

묘지문을 나서는 신사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죠.”


《수레바퀴 아래는》는 말한다.

한스는 너무 성실하게 요구에 응답한 아이였을 뿐이라고.


우리는 여전히 알면서도 바꾸지 못한다.

무엇이 수레바퀴를 더 크고 무겁게 만들고 있는 건지,

지금 그 아래로 누구를 밀어 넣고 있는지.



냉정한 사람들

"당신들의 눈매는 참으로 냉정합니다.

모든 것을 돌처럼 만들려 합니다.

그 속에는 조그마한 꿈 조각 하나 없고 냉랭한 현실만이 들어있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햇빛이라도 비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다는 것을 울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한스가 하고픈 이야기를

헤세에게 시로 달라고 부탁해서

지은 시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