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조력자
최민호의 차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갔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어둠 속으로 낡은 간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입석초등학교 - 폐교'
"여기가 안전한 곳이라고요?" 미쓰리가 창밖을 내다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폐교잖아요. 여기 진짜 사람 안 와요?"
"2년 전에 범인을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에요."
최민호가 차에서 내리며 설명했다.
"인가와 떨어져 있어서 아무도 오지 않죠. 그래서 우리 팀원들이 '안가'라고
이름 붙이고 가끔 사용해요."
"안가요?"
"안전한 곳이라는 뜻도 있고, 사람들이 안 가는 곳이라는 뜻도 있고."
최민호가 쓸쓸하게 웃었다.
폐교의 정문은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최민호는 익숙한 듯 담장 한쪽 구멍으로 들어갔다.
"여기로 따라오세요."
교정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놀이터의 철봉은 녹이 슬어 있었다.
그래도 건물은 비교적 멀쩡했다.
"막내가 비상식량을 채워넣어서 당분간은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최민호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1학년 1반 교실에서는 인터넷도 돼요. 근처에 기지국이 있거든요."
미쓰리는 노트북 가방을 꽉 껴안고 최민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오래된 학교 냄새가 배어 있었다.
먼지와 습기,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며든 듯한.
"여기예요."
최민호가 1학년 1반 문패가 붙은 교실 문을 열었다.
교실 안은 의외로 깨끗했다.
책상과 의자는 모두 치워져 있었지만, 바닥은 쓸려 있었고
칠판에는 누군가 '안가 사용 규칙'이라고 적어놓았다.
1. 사용 후 정리정돈 필수
2. 쓰레기는 가져가기
3. 비상식량은 아껴 먹기
4. 인터넷 과다 사용 금지
미쓰리가 칠판을 보고 피식 웃었다.
"형사님 팀원들, 재미있네요."
"네 번째 규칙은 당신을 위해 쓴 것 같은데요."
최민호가 허탈하게 웃으며 벽 콘센트를 확인했다.
"전기는 들어와요. 인터넷도 잘 돼요."
미쓰리는 즉시 노트북을 꺼내 바닥에 앉아 컴퓨터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이제 본격적으로 파헤쳐볼 수 있겠네요."
최민호는 의자도 없는 빈 콘크리트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미쓰리가 컴퓨터를
연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이 나왔다.
'이 여자, 정말 대단하다. 이 상황에도 저렇게 의욕적이라니.'
"아, 잠깐만요." 최민호가 벌떡 일어났다.
"교장실인가... 아마 어딘가에 라꾸라꾸 침대가 있을 거예요."
그는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가며 문들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교무실, 방송실, 보건실...
"있네요!" 교장실 구석에서 접이식 라꾸라꾸 침대를 발견했다.
먼지를 털어내며 들어올렸다.
'침대가 하나뿐이네.'
다시 이것저것 뒤져보니 창고에서 낡은 침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냄새는 좀 났지만 그래도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라꾸라꾸 침대를 끌고 1학년 1반 교실로 돌아왔다.
미쓰리는 여전히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었다.
"침대 가져왔어요. 이쪽으로 오셔서 좀 쉬어요"
최민호가 침대를 펼치며 말했다.
미쓰리는 침대를 보자마자 눈이 반짝였다.
"우와! 최고예요!"
그녀는 재빨리 노트북을 들고 침대로 옮겨 누워버렸다.
"이제 완벽하네요. 침대에서 수사하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어요."
최민호는 구석에 침낭을 깔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대범한 분이시군요."
"형사님, 저 내일은 출근합니다."
미쓰리가 침대에서 뒤로 누워 노트북 화면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예???"
최민호가 침낭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요?"
"네. 회사에 직원이 저뿐이라서 안 나가면 안 돼요."
미쓰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건 저의 취미생활이지만, 본업에는 충실해야죠."
"취미생활이라고요?" 최민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지금 우리 생명이 위험한 상황인데 취미생활이라니!"
"아, 물론 중요한 일이죠. 하지만 제가 회사에 가지 않으면 고객들이 피해를 봐요."
미쓰리가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편안한 자세를 찾았다.
"그리고 사실, 회사에서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더 좋을지도."
"더 좋다고요?"
"네. 회사 컴퓨터가 더 빠르거든요. 그리고 여러 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서..."
미쓰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설명했다.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어요."
최민호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여자,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구나."
그때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최민호는 즉시 몸을 낮추며 창가로 다가갔다.
"조용히 해요 노트북 불빛!" 그는 미쓰리를 단속시키고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봤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폐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차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바로 동영상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최민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쓰리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노트북을 조심히 챙겨 침대에서 내려왔다.
"뒷문이 있나요?"
"있어요. 하지만..." 최민호가 밖을 다시 확인했다.
검은 정장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차에서도 두 명이 더 내렸다.
"포위당한 것 같아요."
미쓰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형사님, 저 사람이 우리를 해치려고 했다면 벌써 했을 거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생각해보세요. 두 번이나 우리에게 경고 전화를 했잖아요. 그리고 지금도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지,
바로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정말 그랬다. 남자는 정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뭘 원하는 건가요?"
"아마... 대화를 원하는 것 같아요." 미쓰리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저 사람, 내부자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것도 우리 편인."
"우리 편이라니요?"
"오르페우스 프로젝트의 진실을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미쓰리가 화면을 보며 분석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힌트를 주고, 위험할 때 경고해주고..."
최민호는 고민에 빠졌다. 나가서 만나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기다려야 할까.
그때 최민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또 모르는 번호였다.
"받아보세요." 미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최형사님, 나오세요. 대화 좀 합시다. 혼자서요."
"당신이 누구죠?"
"엔드스톤사 내부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남자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저는 당신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우려고 해요."
"믿을 수 있나요?"
"지금까지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드렸잖아요."
정말 그랬다. 첫 번째는 엔드스톤사에서 나올 때,
두 번째는 미쓰리 집에서 도망칠 때.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최민호는 미쓰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가겠어요."
전화를 끊고 최민호는 미쓰리에게 말했다.
"만약 제가 30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고 도망가라, 그런 말씀이시죠?"
미쓰리가 침대에 다시 누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나름 위기 대처 능력이 있어요."
"CSI에서 배운 건가요?"
"CSI, 크리미널 마인드, NCIS... 다양한 곳에서요." 미쓰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최민호는 한숨을 쉬며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 여자, 정말 대단해. 무서울 것도 없나?'
그는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정장 남자가 담배를 버리고 그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최형사님."
남자는 생각보다 젊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얼굴에는 피로가 깊이 밴 것 같았다.
"당신이 누구죠?"
"제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남자가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에요."
"뭐가 들어있나요?"
"오르페우스 프로젝트의 전체 실험 기록과..."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음 희생자 명단입니다."
최민호는 USB를 받아들었다.
"왜... 왜 도와주시는 거죠?"
남자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단순한 의학 연구인 줄 알았어요."
그의 목소리에 후회가 묻어났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될수록..."
"실험에 참여했다는 말씀인가요?"
"저는 그들의 보안 책임자입니다." 남자가 고백했다.
"지금까지 모든 증거를 없애는 일을 했어요. 오르페우스 프로젝트의 기술을 이용해서."
최민호의 등에 차가운 땀이 흘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남자의 주먹이 떨렸다.
"다음 주에 새로운 실험이 시작돼요. 이번엔... 이번엔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요?"
"가출 청소년들이에요. 아무도 찾지 않을..."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최민호는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이 악마같은 놈들이..."
"그 USB에 모든 증거가 들어있습니다. 실험 동영상, 희생자 명단, 고객 리스트..."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그들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저는...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남자가 쓸쓸하게 웃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저도 실험실로 갈 거예요."
"도망치세요!"
"어디로요? 그들은 어디든 찾아낼 수 있어요." 남자가 고개를 젓했다.
"대신 당신들이 진실을 밝혀주세요."
그때 멀리서 다른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그들이 오고 있네요." 남자가 급하게 말했다.
"뒷문으로 나가세요. 차를 준비해뒀습니다."
"같이 가요!"
"안 됩니다. 저는 시간을 끌어야 해요." 남자가 최민호를 떠밀었다.
"어서 가세요!"
최민호는 뛰어서 교실로 돌아갔다.
"미쓰리! 당장 나가야 해요!"
미쓰리는 이미 노트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나중에 하고, 우선 여기서 벗어나요!"
두 사람은 뒷문으로 뛰었다. 정말로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는 바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차를 몰고 산길을 내려가면서 최민호는 백미러를 확인했다.
폐교에서 불빛이 보였다. 아마 그들이 들어간 것 같았다.
"형사님, 정말 출근해도 되죠?" 미쓰리가 옆자리에서 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네, 중요해요. 이 USB 내용을 분석하려면 회사 컴퓨터가 필요하거든요."
미쓰리가 USB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회사가 더 안전할 수도 있어요. 사람들 눈에 띄는 곳이라서."
최민호는 또 한숨이 나왔다. "이 여자, 정말 무모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는 미쓰리가 어쩌면 이 사건을
해결할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내일 회사에 같이 가죠."
"정말요? 고마워요!" 미쓰리가 환하게 웃었다.
새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길고 긴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