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 미쓰리는 회사에서 반차를 내고 최민호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전날 도망치던 미쓰리와 최형사에게 약속 장소가 찍힌 문자가 왔었기때문이다.
찝찝했지만, 시작을 했으니 이유라도 찾자는 미쓰리의 고집에 최민호가 손발을 들면서
지금 미쓰리와 함께 공원 벤치에 오게되었다.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서 기다리던 중,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최형사님, 반갑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전화로 들었던 것과 같았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단단한 체격에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전화했던 사람인가요?"
"네. 제 이름은 강철민입니다. 엔드스톤사 보안팀 팀장이죠."
최민호와 미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적의 내부 인물이라니.
"혹시나 모를 위험이 있으니까..." 최민호가 미쓰리에게 속삭였다.
"제가 먼저 대화해볼게요. 전화 연결해두고 상황을 알려드릴게요."
미쓰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최민호가 강철민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 내용에 집중했다.
"왜 우리를 도와주시는 거죠?" 최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개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강철민의 목소리에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때 강철민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최형사님, 전화 통화하고 계시죠? 그냥 같이 오라고 하세요. 우리가 대화해야 할 내용이 많거든요."
최민호는 당황했지만 미쓰리에게 손짓했다.
"미쓰리, 이리 오세요."
미쓰리가 다가가면서 강철민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순간,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녀의 머릿속에 얼핏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노근수씨를 태우고 가던 검은 승용차. 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의 뒷모습이.
"혹시... 노근수씨를 아시나요?"
강철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떻게 그 이름을..."
"제가 그분을 마지막으로 본 게, 검은 승용차를 탄 모습이었거든요. 혹시 그때..."
"맞습니다." 강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였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어요?"
강철민이 벤치에 앉으며 시작했다.
"저는 특수부대 출신입니다. 군 복무 중에...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훈련 중이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병원에서."
최민호와 미쓰리는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일용노동자셨어요.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시는 분이셨죠.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하시더라고요.
엔드스톤이라는 회사에서 좋은 제안이 왔다면서..."
강철민의 주먹이 저절로 움켜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건강검진이라고 했대요. 참여하면 상당한 금액을 준다고.
아버지는 그 돈으로 제 결혼자금을 마련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실험에 참여하신 건가요?"
"네. 그런데..." 강철민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그 실험에서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미쓰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험이 실패한 건가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의학 실험에는 위험이 따르는 거니까.
아버지도 그걸 알고 참여하신 거라고 생각했죠."
강철민의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
"제대를 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엔드스톤사에서 입사 제안이 왔어요.
아버지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열심히 일했어요.
보안팀장까지 올라갔고..."
"그런데 뭔가 발견한 거군요."
"네. 보안실에서 우연히 오래된 파일을 발견했어요."
강철민이 주머니에서 낡은 파일 봉투를 꺼냈다.
"이게... 아버지에 대한 실험 계획서였어요."
그가 파일을 열자, 누렇게 바랜 서류들이 나왔다. 맨 위에는
'피험자 003 - 강병호'라고 적혀 있었다.
"강병호... 그게 아버지 성함이신가요?"
"네." 강철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계획서를 보고 알았어요. 아버지는 실험 부작용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요."
미쓰리가 서류를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끔찍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1단계: 의식 유지 상태에서 신경계 반응 관찰'
'2단계: 고통 역치 측정 및 한계점 파악'
'3단계: 뇌파 변화 추적'
'4단계: 최종 스톤화 과정 진행'
"이건... 이건 실험이 아니라 고문이잖아요." 최민호가 경악했다.
"옛날 일본군의 만행과 똑같아요." 강철민이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모든 과정을 당하신 후에... 살해당하신 거예요."
서류 마지막 페이지에는 빨간 색연필로 쓰인 글이 있었다.
'상태 A급, 스톤화 가능'
그 글자를 본 순간, 미쓰리와 최민호는 소름이 돋았다.
"스톤화가 뭘까요?" 미쓰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강철민이 대답했다.
"하지만 분명히 끔찍한 일이에요."
최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이게 다 실제 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너무... 너무 소설 같아요. 거대 기업의 음모, 인체실험, 그리고 복수를 위한 내부자까지.
마치 누군가가 쓴 스릴러 소설 같다고요."
미쓰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21세기에?"
강철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해요.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거든요."
그가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하지만 이것들을 보시면... 이게 현실이라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서류에는 더 많은 피험자들의 명단이 있었다.
수십 명의 이름과 함께 '스톤화 완료', '실험 중', '대기 중' 같은 상태가 적혀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네. 모두 같은 운명을 맞았거나, 맞게 될 사람들이에요."
미쓰리가 자세히 살펴보니 노근수씨의 이름도 있었다. 상태란에는 '스톤화 진행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노근수씨는 아직..."
"살아계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강철민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많지 않을 거예요."
최민호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죠? 왜 하필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거예요?"
"형사님은 이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려고 하시잖아요. 그리고 미쓰리씨는..."
강철민이 미쓰리를 바라봤다.
"컴퓨터 실력이 뛰어나시죠. 엔드스톤의 보안 시스템을 뚫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나중에 알게되겠죠. 이유를.."
"그게 무슨??.."
"우리가 미쓰리씨를 주시하고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위험 인물로. 하지만 지켜보니...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미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내가 도움이 된다고? 사람을 실험하는 행위에?'
미쓰리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정말 영화 같아요. 너무 극적이라서 실감이 안 나네요."
"현실이 때로는 소설보다 더 극적일 수 있어요." 강철민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세 사람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햇빛이 기울어가는 공원에서, 그들은 믿기 어려운 현실 앞에 서 있었다.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 진실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미쓰리가 물었다.
강철민의 눈에 결의가 차올랐다.
"엔드스톤사의 핵심 시설에 침투해야 해요. 그곳에 모든 증거가 있을 거예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저와 함께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진실을 향한 더 위험한 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