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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채워가는 하루

by 둥이

다시 채워 가는 하루


산본성당 수원주보


" 늙수그레한 아들이 훠이훠이 모래밭을 걸어갑니다 양손에 지팡이를 들고 요동 하나 없이 서 있는 더 늙수그레한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맑은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마스크를 벗겨 드리는 김해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단정히 매만져 주기까지 한 아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들이 엄마를 바라봅니다 왼쪽에서도 바라보고 오른쪽에서도 바라보다 바다를 배경 삼아 가운데로 자리를 옮기기도 합니다 푸른 하늘과 바다에 멋들어진 풍경 한번 바라볼 듯도 하지만 아랑곳없이 그저 어머니 만을 바라봅니다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을 켜고 이리저리 다리를 옮겨가며 구도를 잡아보는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만을 그윽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자식 얼굴 외에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어머니는 아들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서 있다가 얼굴 가득 베시 시의 웃음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성당 주보에 실린 한 꼭지 산문이다


동해 한섬 해변의 모래밭 위를 거니는 올해 68세의 아들과 92세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꽂혔다 뭉클한 울림이 내게 다가왔다



치매 걸린 어머님의 마스크를 잡아주는 아들의 사진이 아름다웠다 사진이 주는 치유의 힘은 잔잔하고 유유했다



여인이 말라 갈수록 또 다른 생명은 그 마름을 양분 삼아 뿌리를 내리고 움틈을 시작했으리라 마름 없는 움틈은 없었으리라 생명의 회귀는 그렇게 저물고 싹트는 공존으로 존재했으리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리지고 태어났으리라


그게 당연한 섭리이리라



인권운동가 이자 역사학자인 리베카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란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 삶은 사라지는 게 섭리이지 살아남는 게 섭리가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리베카솔닛의 문장들은 호흡을 가쁘게 했다 활자가 글이 아닌 소리로 바스락 거리며 다가왔다 거친 손마디가 스집고 스쳐 갈 때 아버지의 살아온 거친 삶의 질감이 잡혔다 생과 사는 이렇게 가깝고도 먼 곳에서 서로의 존재를 자기의 중력으로 잡아당긴다




모두에게도 있었을 생명이 싹트는 시절 ᆢ 그 한 시절 ᆢ 우리는 기억할 수 없는 그 시절을 ᆢ기저 속에 흩어져 있는 자욱한 향수를 ᆢ 시간은 어머님의 기억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았고 그 사라짐을 통해 한 생명이 뿌리를 내리고 순환의 삶을 영유해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너와 나는 이 명백한 섭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연은 지금까지 이 섭리 밖의 다른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68세의 아들이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은 우리의 눈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주 가족 모임이 있었다 중복과 말복사이 ᆢ일 년 중 덥기로는 절정 이었을 그 어느 날에 어머님은 태어나셨다고 했다 작년보다 더 작아지신 두노인이 가여워 젓가락질이 편치 않았다 늙어 사라져 가는 것 ᆢ 소멸해 가는 것 ᆢ이것이 마땅한 섭리 이거늘



이것이 "섭리 로서의 소멸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 이거늘 ᆢ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꽃은 바람에 지지 않는다 피면 지고 차면 이울기 마련이라서 꽃은 꽃의 시간이 다해서 지는 것이다 저 꽃을 지게 하는 건 바람이 아니라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시간이다~ 주렴 밖으로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있다 아니 꽃이 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애송시 100편 낙화 조지훈 서평 P192)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 어언 간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하얀 미닫이가 /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



부모님을 뵐 때면 눈안압이 높아진다


슬픔의 밀도는 조용히 몸에 스며들었다



칼날이 멀지 않았다는 걸 웃으며 이야기하신다 늙은 눈동자 속에 표정 잃은 아들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아들의 마음을 아시기는 한 걸까 아마도 결은 달라도 서로를 바라보는 감정의 색깔은 같을 것이리라,, 깊고도 푸른색 ~리베카솔닛이 말한 어머님을 바라보는 그 향수와.. 서로의 기억 속에 서로를 지탱해 주는 ᆢ잡히지 않을 뿌연 자욱한 기억들의 향수들은 멀고도 깊은 푸른색의 기억들이다 가까이 다가 갈수록 옅혀 지고 사라지는 먼 곳의 풍경처럼 우리 기억에 배어있는 푸른 향수는 다가설 수 없는 애틋함으로 그곳에 서있다 그 푸른 기억들은 오늘과 내일을 살게 해주는 물기 많은, 풍성함을 더해주는, 마음 텃밭 일께다 그 텃밭에서 우리는 하루를 다시 채워가며 살아간다




현재를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은 물기 잃어 푸석하고 메마르다 작은 씨앗하나 뿌리내릴 수 없다 그래서인지 타자의 마음을 보지 못한다 체 자기 한 몸 감당해 내지 못한다 사라짐과 태어남을 ᆢ자연을 떠받치는 그 섭리가 슬픔이 아닌 행복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마음 텃밭을 ᆢ


그렇게 무엇을 심어도 길러내는 마음밭이 예쁜 곳으로 ᆢ




일상의 행복으로 오늘을 채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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