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법칙

늙어감에 대하여

by 둥이


어느 날 말도 없이 여름이 가버렸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갑자기 짐을 싸고 휙 떠나버린 여관방 손님처럼, 장롱 속 가을 옷을 꺼내 입고 그렇게 계절이 바뀌었다. 일 년에만 네 번을 만나고 헤어지는데도 한 계절이 가고 나면 늘 마음 한편이 아련해진다.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매번 새롭고 매번 아쉽다. 한 계절이 가고 또 한 계절이 오는 시기에는 정확하게 찾아오는 것들이 있는데 그건 시간의 감촉들이다. 딱 이맘때쯤이면 잊고 살아간 것들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하고 가까운 친구나 부모님의 나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온도가 만들어주는 감정의 변화는 계절이 바뀌어 가는 시기에 더 진해지고 깊어진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어슴푸레하게 느끼는 건 노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늙어 간다는 건 어느 날 말도 없이 가버린 여름 날씨와도 같다. 장롱성 스웨터를 찾아 입듯 어느 날 아침에 늙음을 입고 있는 걸 알게 된다. 계절이 바뀌듯 아무 저항 없이 시간은 나를 옭아매어 늙음을 턱 하니 놓아준다. 우리에 무릎 위에, 눈가위에, 손등 위에, 그리고 우리 마음 위에 가지런히 자수 놓듯이, 날실과 씨실이 매듭으로 얽혀지며 아름다운 천을 직조하듯이, 또렷하고 명확하게 늙어감은 벗어날 수 없는 그물이 되어 아주 작은 것 에서부터 우리에게 자국을 남겨준다.

아마도 그래서 일 거라 짐작해 본다.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가버린 여름이 그렇게 못내 서운하기까지 한건, 아마도

그건 설명하려야 설명할 수 없는 형태 없는 것들이어서 감정을 건드려 뒤를 바라보게 해 준다. 내가 걸어온 뒷모습을 보며 가야 할 앞날을 생각해보게 해 준다.

아마도 어느 날 말도 없이 가버린 여름에겐 그런 여운이 있을 것이다. 여운의 그림자를 매달고 산책길로 나선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처음으로 내 눈에 와닿은 풍경은 자유롭게 산책 나온 검은 개 한 마리였다.


산책로 신호등 앞으로 목줄을 길게 늘어 뜨리고 걸어가는 작은 검은 개 한 마리가 보였다. 검은 개의 주인은 길게 목줄을 풀어 주어 개가 어디로든 마음먹은 데로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개는 검은색이었고 아주 작았다. 개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서 강아지라고 불러야 더 어울려 보였다. 검은 개는 윤기 나는 반들반들한 털이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개 주인이 개에게 쏟는 정성이 그대로 보여지는 듯했다. 검은 개는 그 작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었다. 강아지 주인은 강아지가 이끄는 곳으로 편안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강아지는 목줄이 채워진 줄도 모른 채 자유롭게 다니고 싶은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까만 개는 목줄이 매어 있어도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듯했다. 개주인은 개가 이동하면 같이 걸었고 개가 멈춰 서면 같이 멈춰 섰다. 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고 개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하게 만들어 주었다. 개는 편안해 보였고 주인은 여기저기 주변을 살피면서 개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다 봤으면 가자 어서 "


아직 덜 놀았는지 흙길로 뛰어들어 땅을 파헤치기도 하고 뒷다리를 들어 영역표시 비슷한 것을 하기도 한다. 누가 주인인지 누가 누구를 산책시키는 건지 잠깐은 헷갈려도 본다.

문득 늘 현재만을 살아간다는 개의 삶을 이야기한 소설이 생각이 났다. 개에게는 어제도 내일도 없는 오직 오늘 이 순간만 있다고 한다. 순간 목줄을 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검은 개의 지금 완전한 이 순간이 온전히 느껴볼 수 있었다.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 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아요. 개는 제가 집에 돌아오면 반갑다고 5분 동안은 제 얼굴을 핥고 나서야 짓기를 멈춥니다. 그때 보면 핥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요.

그리고 밥을 주면, 이 세상에서 밥을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먹어요. 잠잘 때도 보면 '아. 아까 주인이 왔을 때 꼬리 쳤던 게 좀 아쉬운데 어쩌지?

그런 고민은 추호도 없어요.

그냥 잡니다. 공놀이할 때도 그 공이 우주예요.

하나하나를 온전히 즐기면서 집중해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카레닌이라는 개를 이야기하면서


가을 산책길에

개를 사랑하는 개 주인의 마음을 보았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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