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의 정
한 소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소녀는 중학생 정도로 보였고 터벅터벅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소녀의 어깨가 들썩들썩 거리는 걸로 봐서 소녀는 울면서 걷고 있었다. "모른척할까 아니면 어깨를 안아줄까 " 가까이 가서야 누나는 그 소녀가 옆집 사는 외사촌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학교 삼 학년 이었던 호성이는 입학금을 내야 하는 하루 전까지도 고모에게 말을 못 하고 울고 있었다. 열여섯 중학생이 살아가는 세상은 희망이 보이지 않은 캄캄한 동굴이었다.
막내 외삼촌은 아이들을 할머니와 할어버지에게 떠맡기고 밖으로 나돌았다. 아이들의 주된 양육은 그렇게 옆에 사는 고모와 고모부의 몫이 되었다. 맏이였던 호성이는 여섯 살 터 우리 외사촌 동생이다. 그 밑으로 동생들이 세명 여자 셋 남자하나,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기 위해 호성이는 빨리 커야만 했고 어린아이의 마음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졌다가도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런 겪지 말어야 할 아픈 기억으로 십 대를 보내야만 했다. 몸은 성인이 돼 갔지만 마음은 햇볕이 필요할 만큼 말라갔다. 외숙모는 아이들 네 명을 낳고 집을 나갔다. 호성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였을까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우리 기억 속에도 외숙모는 뚜렷한 질감으로 남아있다. 얼굴 생김새와 머릿결, 눈동자 어떤 말들을 재미나게 해 주었고 팔다리가 유난히 긴 키가 컸던 외숙모는 나의 유년시절 속에 한 명의 등장인물로 남아있다. 외사촌 동생들을 생각할 때마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동시에 소환되어 나온다.
"나에겐 고모 고모부가 부모야
지금까지 살면서 중학교 삼 학년 입학금 낼 때와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힘들고 최악이었어 근데 죽고만 싶었던 그 시절에 고모 고모부가 곁에 있었어 부모처럼 우릴 들여다 봐주고 보살펴 주었어 "
"난 내 남편한테 지금도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 내 부모는 우리를 버렸지만 고모 고모부는 우리를 버리지 않고 키우셨어 특히 고모부는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으셨고 쌀한가마 고구마 농사지은 모든 것을 같다 주셨어
자기는 고모 고모부 은혜 잊으면 안 돼 강조해서 말해주고 있어 "
막걸리 몇 잔에 호성이는 빗장을 풀어 제치고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얼굴이 발그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부모의 대한 원망과 애절함이 무디어졌다가도 불현듯 서러움으로 찾아왔다. 일 년에 한 번 김장 담그는 날 외사촌 동생들과 모여 김장을 담그며 우리는 옛날이야기 사는 이야기도 꺼내여 담갔다.
"나는 고모집이 참 따뜻해서 좋았어 "
난방비 때문에 외삼촌집은 늘 냉골이었다. 거실을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로 집은 얼음장판 같았다. 몸은 추웠고 마음은 서러웠다. 부모의 부재는 사랑의 결핍을 가져왔다.
아무리 몸이 춥더라도 마음 울타리가 든든하면 마음만은 따뜻한 법이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이다.
호성이의 눈가는 그렁그렁 반짝였다. 서로의 기억 속에 유년의 풍경을 같이 간직한 우리들은 모여 이야기하는 것 만으로 푸짐하게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일이 등록금 마지막날이니까 우선 등록부터 하자"
외사촌 동생의 눈물은 누나에게도 아픔이었기에 누나는 모아둔 박봉월급을 쪼개어 등록금을 내주었다. 엄마와 누나의 보살핌으로 호성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없이 고맙기만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그래서 그 기억을 쫓아 잘 살아갈 수 있었다는 건 어찌 보면 축복이다.
나에겐 엄마이자 외사촌 동생들에겐 고모였던 그 한 분의 사랑은 푸짐한 밥상처럼 모두를 먹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