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낙산공원 주차장이었다. 처음엔 낙원상가 근처에 있는 주차장인줄 로만 생각했었다.
앞글자가 "낙" 자로 시작되는 지명이 흔치 않아서 그래도 악기 전문상과 한때 전자 제품 매장이 모여있는 낙원상가가 먼저 생각이 났다. 그럴걸 보면 인간의 뇌는 피상적인걸 보고 쉽게 구체적인 것으로 단정 지으려 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뇌과학자들이 말하는 최대한 에너지를 덜 쓰려고 하는 게므론 장기가 뇌 라고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미국 사는 친구가 일 년에 한두 번씩 올 때마다 우리는 동창회 하듯이 모임을 가진다. 이번에 모이기로 한 장소는 낙산주차장이었다.
아침 일찍 낙산공원 주차장을 찍고 서울로 향했다. 낙산은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한양 성곽이 이 산의 능선을 따라지어졌 있었다. 산 높이가 125m인 이 작은 산은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산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낙산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내가 생각했던 쌍방향의 도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옛 골목길, 차하나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시간이 쉬었다 가는, 그림 같은 골목길이었다. 혜화동의 골목길은 시간의 감성을 그대로 품은 체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듯했다. 그 골목 안을 걷는 동안 우리는 오래전 시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까까머리에 코흘리개 동네아이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연탄재가 날아다니고 전봇대에 까만 고무줄을 연결해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동네누나들도 보이는 듯했다. 오래전 없어진 삼색등이 돌아가는 이발관과 미닫이 문에 붙어있는 군입대자 7000원 글자에 배어있는 이발관 사장님의 정감이 따뜻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촘촘히 잇닿아 있는 기와지붕들은 윗집과 아랫집의 지붕으로 연결되어 기와지붕들만 이어진 하나의 풍경이 되어 서울 혜화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골목 안은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고 낙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기와집들 사이로 수많은 계단들은 마치 천국의 계단처럼 보였다.
이제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전봇대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전선줄들이 층층 계단과 어우러져 있다. 낙산 성곽 주변으로 인가들이 닿아 있어서 산책하며 고개만 돌려도 일상의 잡다함을 잡을 수가 있었다. 마당에 심긴 감나무에는 익어가는 감들이 풍성하게 매달려 있었다. 까치와 비둘기들이 감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골목마다 낮은 지붕과 낮은 벽돌담들은 골목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일상을 품고 있는 낙산공원 골목길은 모든 것이 정겨웠다.
따뜻한 가을 햇볕과 그 햇볕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오래된 친구들과 그리고 그들과 같이 걷는 산책길은 "참 좋다" 란 말을 계속해서 뱉어내게 해 주었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게 그리 많지가 않음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따뜻한 햇볕, 같이 걸을 수 있는 오랜 친구, 같이 먹는 분식 한 끼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한참을 낙산 성곽길과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눈에 보이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조금만, 푸짐한 저녁식사를 위해서 우리는 만만한 분식집으로 찾아들어갔다. 선약이 있어 동행하지 못한 친구가 오성급 플라자호텔 뷔페식당을 저녁식사로 예약해 두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저렴한 우리의 입맛은 분식집의 떡볶이에 길들여져 있었다. 아니면 적당한 때에 때맞춰 먹는, 그도 아니라면 힘든 산책 후에 먹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랄까 여하튼 분식집의 모든 메뉴는 천상의 맛이었다. 별것 없는 멸치김밥과 고추김밥을 한입씩 물고 우리는 감동을 하며 찬사를 보냈다. 어묵 네 개를 하나씩 나눠 먹으며 하나 남은 어묵은 내 거라며 음식 욕심도 내어 보았다. 이보다 저렴한 음식을 이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순간 눈주름이 가득한 가면을 쓴 채 늙어버린 고등학생이 되어 버렸다. 아름다운 자기만의 색깔로 익어가는 중년의 우리들은 낙산공원을 산책하며 하염없이 정다웠고 푸짐하게 행복했다. 그 만찬에는 그리 많은 반찬이 올라와 있지 않았다. 가을 햇볕과 낙엽과 분식집 그리고 그것을 함께할 친구 그리고 멈춰버린 시간..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다서손가락을 벗어나지 않았다.
낙산 공원 성곽 산책로는 서울을 풍경으로 품고 있었다. 십일월 중순 낙산의 늦은 가을은 마치 낙엽 분해물의 큼큼한 냄새와 사사삭 오색 낙엽 덤불을 밟는 소리와 울창한 나무가 가진 색을 발산하는 다홍색으로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 같았다.
낙산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올 때쯤, 저 멀리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흑백의 명암만으로 하늘과 산들이 둘로 갈라질 때쯤, 어둠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세상을 덥어가려고 할 때쯤, 우리는 플라자 호텔로 출발했다.
"양고기가 일품이야"
부지런한 친구는 플라자호텔 맛 후기까지 둘러보고 온 듯 양고기를 한 접시 들고 와 먹기 시작했다.
뷔페식당은 늘 그렇듯 접시 들고 한 바퀴 돌 때만 하더라도 세상 이보다 더 맛있을까 몇 접시는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두 접시만 먹고 나면 입맛이 사라지게 된다.
오성급호텔의 푸짐한 뷔페가 골목길 부식집의 떡볶이에 완패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물 한 컵과 착즙주스 두어 잔을 마시면서 역시 라면이 제일 맛있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 근데 상호한텐 미안한데 나는 점심으로 먹은 라면 떡볶이가 훨씬 맛있었어"
단톡방에 올라온 문자에 우리는 모두? 나도 그랬어" 미투로 공감해주었다.
친구들과 같이 했던 오늘 9시간..
며칠을 보고 온듯한 애틋함과 서훈함
방금 보고 온듯한 정겨움
훌훌 털어지지 않은 이 묘한 감정은
늙어서 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늙어 갈수록 이런 친구들과 곁을 나누고 보고 싶다는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게여간 행복한 일이 아님을 깨달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