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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Apr 07. 2024

라면의 정석

맛있는 라면을 먹었을 때

라면의 정석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처럼 집집마다 조리법이 조금씩 다른 그런 평범한 음식들이 있다. 그렇다고 된장찌개에 된장이 안 들어가거나 김치찌개에 김치가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 그 맛에 길들여지곤 한다. 어느 지방이나 지켜야 할 본질은 지킨다지만 아마도 그 맛의 차이란 건 아주 작은 부수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 듯하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음식  만든 것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불에 온도라든가 멸치의 크기라든가 마늘을 언제 넣어야 되는가라든가 뚝배기와 찌그러진 냄비 어느 것으로 끓이느냐의 차이 랄까 뭐 그 정도로 생각하곤 아 맛이 조금 다르네 하며 먹곤 하였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중요치 않다는 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된장의 숙성도과 김치의 감칠맛이겠지만, 내가 가진 된장과 김치가 장인이 빚어낸 수준이 아니라면 조금씩은 다른 조리법으로 음식을 만드는 나만의 레시피가 만들어지는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운 청양 고추를 넣느냐 하는 것도 그중에 하나일 것이다.


최근 난 집 근처 상가에 있는 김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른 적이 있다. 평소 아내 심부름으로 가던 김밥집 이었지만 안에서 무엇을 주문해서 먹어 보지는 못했던 곳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네 여서 그런지 성당 자매들이나 아이들 학부모들을 만나게 될까 봐 땀 흘리며 먹어야 되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여서였다. 그날은 아내가 밖에서 먹고 오라며 늦게 들어오라고 한날이어서 어떡하든 밖에서 주말 점심을 때워야 했다. 나는 유재석처럼 라면과 국수를 좋아한다. 유재석이 국수를 좋아하는지는 정확 친 않지만 라면을 좋아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라면과 김밥 한 줄을 주문하고 분식집 한구석으로, 문에서 되도록 잘 안 보이는 구석진 귀퉁이로 들어가 앉았다.

내 옆에선 먼저 와 자리에 앉아있는 아주머니가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쥔 채 라면 국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라면 그릇 옆에는 비어있는 김밥접시도 보였다. 나와 같은 주문을 한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사람의 표정은 대부분 비슷하다.


딱 저 정도의 표정을 짓는다.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만족스럽다는,


띵똥 21번 손님 라면 김밥 나왔습니다.


사장님의 목소리는 호출기가 부르는 것보다 더 정감스럽게 들렸다.


작은 플라스틱 쟁반 위에 놓인 라면 한 그릇과 김밥 접시와 노란 단무지와 김치가 놓여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라면은 떡과 김치가 들어가서 오래 끓인 그러니까 떡이 불어 국물이 자박자박하게 끓고 있는 거품이 용암 끓듯 둥글게 느리게 올라오는 라면을 좋아한다. 이런 라면을 끓여서 올려놓으면 아내는 개밥 같다며 먹지를 않는다. 김치향이 라면에 베어 들여 얼핏 김치죽 같기도 한 이런 라면을 난 너무 좋아해서 혼자 있는 날이면 아내 몰래 끓여 먹는다.


그런데 그날 내 앞에 놓인 쟁반 위에 라면은 그냥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그냥 라면이었다. 우선 계란이 국물에 퍼져 있지 않고 넓게 덩어리 져 라면을 덮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대파가 적당히 익혀진 색감으로 그래도 아직은  녹색과 허연 몸통의 섬유질을 유지한 체 라면 국물 위에 떠 있었다.


에이 이건 그냥 라면이네


라면의 비주얼이 나의 허기를  가시게 했다. 기대감이 없었기에 그냥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라면을 후루루

유튜브 먹방처럼 먹기 시작했다.


난 아직도 그때의 식감을 잊을 수가 없다. 쫄깃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내가 그렇게도 이야기한 라면은 라면다워야 한다는 그 말을 그제야 조금 알 수가 있었다.


젓가락 만에 순삭 하며 라면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야말로 라면의 정석이었다.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은 라면 수프만으로 오직 선불과 조리 시간과 아주 적당한 물의 양과 그리고 라면맛을 침범하지 않은 대파와 계란의 환상의 궁합 ᆢ


천상의 레시피는 라면봉지 뒤에 적혀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 상가 앞 분식집을 들를 때면 라면 곱빼기를 주문한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아내와 같이 들려 그 환상의 라면을 같이 먹기까지 하였다.


역시 아내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라면은 라면다워야 돼"


라면은 라면 조리법 대로 맛있게 끓여 먹어야 된다. 이건 내가 반백년을 살아가며 깨달은 라면의 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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