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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Apr 06. 2024

선명한 기억의 배반

기억이 지닌 이중성

선명한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들이 있다. 그런 기억은 어떤 대단한 일도 아니어서 실망스러워질 때가 있다. 일의 본질로 보면 사소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날의 햇살이나 바람 이라든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와 나눈 이야기만 생각이 난다든지, 어느 사람의 깊게 패인 보조개 라든가 통계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의 기억 속에 묻혀 있다가 어느 순간 나 여기 잇어  하며 불이 켜진 듯 연결되어 소환되어 온다.  기억은 생소한 것들도 있고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들도 있다.


어느 날엔 인사까진 나누고 웃으며 헤어졌는데 일주일쯤 지나 그때 인사 나눈 사람이 초등학교를 같이 보낸 아랫집 여자 동창 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생각나는 경우도 있다.

왜 나의 기억은 그 순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뒤집어서 천천히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 아이도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왜 내게 "야 누구야" 하지는 않고 의례 내가 알고 있는지 하며 인사를 나눈 듯하다. 지금도 이상했던 건 아 내가 아는 사람이구나란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지만 정확히 그 사람이란 생각으로 인사를 한 게 아니어서 난 한동안 아니 오래도록 혼란스러웠다.

기억은 보편적이지 않다. 가끔씩은 나를 아는 사람의 기억은 과연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란 사람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눈매를 보고 몇 마디 말을 나누면 정확히 그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동창과 악수하고 지나치면서도 도무지 그 아이가 유년시절의 그 아이라는 걸 몇 주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사건이 있은 후부터 난 내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뇌는 네트워크의 기반을 둔다고 한다.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고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고 지금을 통해 미래를 연결한다. 기억은 마치 어두운 골목길을 비쳐주는 가로등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번쩍 스파크를 일으키고 또렷한 형상을 불려 온다. 그러곤 오래전에 아주 잠깐 스쳐간 사람의 눈주름과 재스민 향기를 끄집어낸다. 옅혀질뿐이지 사라지지 않는 게 기억이다. 어느 날의 선명한 기억 입자들 안엔 까만 눈동자와 수줍은 미소와  멈춰 선 흰구름이 포개져 있었다. 해리포터의 스네이프는 죽어가며 눈물 한 방울로 모든 것을 헤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마법사가 아니기에 그럴만한 능력은 없다 해도

사람마저 구분 못하는 사람이 돼 가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지금도 난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이나 사람 같은 선명한 기억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그날의 날씨나 장소 같은 사소한 기억들만 지워지지 않고 선명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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