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혈관계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던 아버지는 논과 밭의 작물들이 잘 자라는지 걱정이 되었나 보다. 퇴원하는 날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현관문을 열어 보지도 않고 논으로 나가셨다. 논물이 꽉 들어차 일렁이는 벼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논둑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아버지의 기력을 잡고 있는 것들이 흙을 부여잡고 반듯하게 일어서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다.
그해 아버지는 모내기를 하다가 논둑 옆 개울가로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그나마 모내기를 끝낸 터라 병원으로 가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정작 허리보다는 심장질환이 발견돼 급하게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심장은 정상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심장으로 이렇게 건강한지를 놓고 의료진들은 천운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아버지의 심장 반은 오래전부터 제 기능을 잃었다고 했다. 신체가 심장 기능의 오십 프로만으로 길들여져 있다고 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삼십 대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고 술담배 고기를 멀리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해온 터라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한 것 같았다. 이런 것을 신의 섭리라고 해야 되는 걸까 아버지는 구순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흙을 일구고 씨앗을 뿌려 순이 돋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자연의 섭리를 궁금해한다. 좋아서 하는 일들엔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대한 몰입들이 있다. 농사의 고단함은 이런 몰입들 앞에선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며 그것은 훅 사라져 버린다.
성당에도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있다.
많은 종교단체나 사회적 연대기관 혹은 의료봉사 단체등 봉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당에 있는 여러 봉사대들 중 잡꿀이라는 자선단체가 있다. 이분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자의로 선택해 봉사활동을 해나간다. 그것도 가족 전체가 나와서 하는 분들도 있다. 한 달에 두 번 즉 이주일에 한 번씩 성당에 모여 반찬을 만든다. 독거노인이나 보호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가정식 반찬을 만든다. 잡꿀 봉사자들이 한데 모여 반찬을 만드는 모습을 사진으로 볼 때마다 표정 가득 피어나는 행복함을 볼 수가 있다.
과연 어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몰입하게 만드는 걸까 이주에 한번 축제하듯이, 마치 마을 잔치 하듯이, 파를 다듬고 전을 부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뚝딱뚝딱 만들어 나간다. 기계적으로 수평적인 공평보다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회적 약자에게 한발 더 다가서려는 종교의 본질을 충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봉사단체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은촛대까지 내어준 장발장의 신부님처럼, 성당에는 마음을 내어주는 착한 봉사자들이 연대하며 기적을 만들어 나간다. 다들 형태 없는 선한 영향력에 몰입되어 서로에게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를 직조해 나간다. 왜만 한 태풍에도 풀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실타래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행복해져 간다. 아마도 나의 아버지도
땅을 일구며 몰입하는 순간순간에 스스로 행복해졌을 것이다.
궤는 다를지라도 몰입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임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오롯이 삶의 시간을 공익적인 시간에 몰입할 수 있기를 바라 보지만 이마저도 쉽지가 않음은 내성적인 성격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쓸 수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기와 글쓰기에 몰입하다 보면 삶의 방향성과 구체성이 명료해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 줌에 감사함을 느낀다. 몰입의 시간이 가져다주는,
뇌의 보상체계는 삶의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그것보다 더한 즐거움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