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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기

중년 남자가 생각하는 시간

by 둥이

몽상의 시간


난 가끔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한다. 마치 친한 친구의 손버릇이나 재밌게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을 생각하듯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 오듯이 방문을 열어젖히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왜 그런 답도 없는 생각을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변변한 답변을 해줄 수 도 없다. 궁색하기 짝이 없지만 시간이란 것은 나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핸드폰 아날로그시계에 있는 시간이라는 숫자는 시한폭탄에 초침 숫자가 사라지듯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준다. 시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한참을 멍하니 아날로그시계를 바라보고 있으면 깜깜한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듯 의식이 몽롱해진다. 마치 채면에 걸린 듯 뇌의 인식체계는 현재의 나와 먼 과거의 나와 방금 전에 없어진 그 숫자의 시간 속에 있던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건 마치 빵이 숙성되며 부풀어 오르듯 시간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 알 수 없는 개념은 나의 뇌 속을 꽉 채워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어떤 날은 너무나 선명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오래된 기억 속의 나의 모습이 마냥 싫어져 피하고만 싶다가도, 또 어떤 날은 내가 어때서 이 정도면 됐지 하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시간은 생각마저 늙게 만들어 몸 보다 마음이 더 빨리 늙어버리진 않을까 불안해질 때도 있다. 시간은 이상하리 만치 현재의 나보다는 과거의 나를 데려와 그 시절의 후회를 부풀리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미래의 나를 불러내 지금 이 순간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시간은 뇌의 보상체계가 도파민을 분출하듯 현재의 나를 자상한 눈빛으로 토닥이며 잘 될 거라며 미소 지어 준다. 이런 것들로 구성된 시간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생(사람의 살아있는 시간) 이란 걸까

그냥 몽상이 아닐까, 시간엔 마침표가 없다. 끝없는 도도림표만 있을 뿐,


나에 이런 생각과는 달리 나의 아버지는 아마도 마음이 몸보다 느리게 늙어가 마치 풍력발전소가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들어 내듯 세상을 살아갈 힘을 생성해 내는 듯하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힘으로 아버지는 시간을 마주 보고 시간에 흘러가지 않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은 수학공식 처렁 딱 떨어지는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시원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만들어 놓은 사실에 대해서만 아주 조금 알 수가 있다. 아마도 시간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 과학적인 언어에 담길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은 철학적 담론과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포자들이 보이지 않은 실타래로 피어나는 균사체처럼, 스멀스멀 형태 없는 덩어리가 주변 모든 것을 잠식해 버리는 포자들의 생명력처럼,

시간은 불별의 존재로 우리 곁에 존재해 있다.


시간은 선명한 실체로 존재해 있지만 또렷하게' 설명되어지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에 갇혀 있다.

우리의 감각 기관중 직접적으로 시간을 인지하는 기관은 없다.


시간은 다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 그 흔적을 보여준다. 시간은 늘 그렇게 감성을 자극하고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기억 속엔 아직 조그마한 어린아이였어야 할 친구의 아들은 울창하게 자라난 느티나무처럼 어느새 단단하게 자라 있었다. 어느 날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늙수그레한 부모님의 얼굴은 또 어떤가! 검푸른 정맥이 손등 위로 고무호스처럼 길게 올라와 있고 두 눈은 깊게 패형 삽날의 고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목깃 사이로 보이는 목주름은 그 사람의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해 준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나라는 자아인식도 시간이라는 포자 안에 스며들어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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