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메루에서 원주민 소녀가 차고 있는 팔찌를 보았는데 5센티미터 너비에 가죽 띠에 색깔이 조금씩 달라서 초록으로도 연 푸른색으로도 군청색으로도 보이는 아주 작은 청록색 구슬이 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그 팔찌는 생명력이 넘쳐서 마치 원주민 소녀의 팔에서 숨을 쉬고 있는 듯했고 나는 그 팔찌가 탐이 나서 파라를 시켜서 소녀에게서 샀다. 하지만 그 팔찌는 내게로 온 순간부터 죽고 말았다. 내 팔에서 그것은 보잘것없는 싸구려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팔찌의 생명력을 창조했던 건 색채들의 유희 다시 말해 토털이나 검은 도자기 같은 생기와 매 옥이 넘치는 원주민 피부의 흑갈색과 팔찌의 청록의 빚어내는 색의 이중주였던 것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중에서- 이구아나 P296 카렌 브릭센 작]
며칠 전 도서관에 들려 몇 권의 책을 골랐다. 평소
나는 보고 싶은 책들을 미리 정해두는 편인데. 그건 몇 안 되는 습관 중에 하나다. 그것은 어떤 책을 읽다가 작가가 추천한 책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의 다른 책일 수도 있고, 과학이나 종교서적 일수도 있다. 마트를 가기 전에 미리 살 것을 메모를 한다거나, 여행 가기 전 케리어를 꺼내 챙겨야 될 물건들을 미리 적어본다거나, 여행지에 사전정보를 미리 검색해서 알아둔다거나, 이렇게 이런저런 미리 무엇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읽어야 할 책들을 메모해둔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매주 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주에 읽을 책들을 도서관에서 대여하거나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 독서는 시간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몇 안 되는 일중에 하나다. 물론 그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건 독서 일수도 있고 등산일 수도 있고 바둑이나 테니스 축구 일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다. 그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대여했던 책중에 한 권이 아웃오브 아프리카였고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어 나갔다.
난 그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오래전에 이 내용을 영화로 봤다는 것을, 흐릿한 이미지들이 문장 속에 있었다.
경비행기가 아프리카 대륙을 날아가는 장면과 사자 사냥을 하는 장면들이, 기억 속에 흐릿한 영상들이 스위치를 켠 듯 또렷하게,
이미지가 글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아웃오브아프리카가 말해 주는 듯했다.
아마도 그런 느낌은 좋은 문장을 읽을 때 내가 느끼는 그 황홀한 기분 때문 인지도 모른다. 작가인 카렌블릭센이 아프리카 원주민 손목에서 반짝이던 팔찌를 보고 느꼈던 그 감정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목이 말라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는 일찍이 사람의 인식과 존재에 가치에 대해서 깨달은 고승이다. 난 카렌블릭센의 아웃오브아프리카를 읽으며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생각났다. 원주민의 팔찌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가치에 대한 판단이다. 고승의 깨달음은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즉 그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대한 것일 것이다. "즉 세상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요, 그 질서는 오로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니 마음을 벗어나면 법도 없음이라”
화엄경에서는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말한다.
굳이 화엄경까지 논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물에 대한 가치는 지극히 상대적이다. 몇 년 전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는 여기저기 마스크 품절 대란이 벌어졌다. 구매 사이트에서도, 약국에서도, 쉽게 대량구매가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때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마스크 한 박스를 보낸 적이 있다. 그 당시 미국은 더 절박했고 친구는 고맙다고 연락이 왔다. 물론 그것도 현물이 없다고 결재취소가 되었지만 온전히 마음만은 전달이 되었던 터라 고마움만 남았다.
지금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제 바뀔지 모른다. 흑인 원주민 손목에서만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었던 청록색 팔찌처럼, 진정한 가치란 때와 장소 그리고 기막힌 타이밍 거기에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
읽고 쓰기 생각하기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삶의 동력과 시간으로 녹아들지 않는다면 그냥 청록색 팔찌에 그치지 않을까, 그 시간이 정말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도록, 원주민의 손목에서 반짝였던 청록색 팔찌처럼,
가치 있는 시간이 내 삶 속에 녹아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