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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Sep 13. 2024

라면수프 이야기

라면수프에 얽힌 이야기

라면수프 이야기


라면은 이제 전 국민이 좋아하는 주식이 되었다. 일인당 라면 소비량만 보더라도 라면이 우리 식문화에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한 건 그렇게 많이 라면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면발 똑같은 수프지만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르고 똑같이 맛있다. 대부분 같은 음식을 여러 번 먹으면 맛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법인데, 라면맛은 흔들림이 없다.

이 정도 내공을 가지려면 그 음식엔 숨길 수 없는 마법이 들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라면수프다. 라면맛을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것, 언제 어디서 먹어도 아주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맛, 변하지 않고 내 혀에 착 감기는 그 맛은 라면수프에 숨어있다.



일명 마약수프 만병통치약 죽은 음식도 살아나게 한다는, 그것이 라면수프다.


어릴 적에 라면수프가 어쩌다 손에 걸리는 날이면 아주 조금씩 손바닥에 올려 혀로 날름날름 아먹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선심 쓰듯 손바닥에 올려 주기도 했다. 그랬다. 그 라면수프 하나면 아이들은 조용해졌고 나도 달라며 서로 달려들었다. 먹다가 금방 없어지기라도 할까 봐 라면수프 입구를 돌돌 말아 바지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아껴 먹어야지 침을 꼴깍 삼켜가며 참아보지만 채 몇 분을 못 간다. 라면수프를 입으로 빨아먹기도 했는데 그런 날이면 수프 안으로 침이 흘러 들어가 분말가루는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래도 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더 먹기엔 좋았다. 날리지도 않고 더 많은 양을 먹을 수가 있었다.

흙과 먼지로 지저분해진 손바닥이 라면수프를 핥아 먹는 바람에 물로 씻은 듯 깨끗해질 때면 수프는 바닥을 보이고 만다.


그때쯤이면 손바닥을 탁탁 털어 바짓단에 쓱쓱 문지르고 코를 킁 들어마신다.  라면수프는 금세 갈증을 불러왔고 우리는 우물가로 모여들어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걸로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되었던지,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동네 아이들은 논과 밭으로 뛰어다녔다.


난 중고등학교 시절을 기숙사 생활을 했다. 누구나 그 이땐 오이처럼 쑥쑥 자란다. 우리는 학교 식당에서 주는 밥만으로 부족했다. 사감선생님 방에 불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7호실 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곤 빨래할 때 사용하던 색이 벗겨진 노란색 들통을 꺼내왔다. 우선 들통에 묻은 하얀 비누가루와 얼룩을 닦아냈다. 닦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지만, 우리들의 허기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몰래 숨겨둔 빨간색 삼양라면 열봉 지를 꺼냈다. 봉지를 뜯고 라면과 수프를 따로 분리했다. 라면수프를 한데 모아 한꺼번에 넣었다. 노란색 들통 안으로 라면 국물이 부글부글 끊어 오르기 시작할때즘 라면 열개를 넣어 휘휘 젖기 시작한다. 다섯 명의 까만 머릿통은 이때부터 서로의 머리통을 부딪혀가며 라면을 걷어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후르르 후르르 순식간에 들통 안은 바닥을 드러낸다. 라면국물 위로 세재냄새가 올라왔다.  종이컵으로 국물을 떡 먹었다. 면발이 불기 전에 익어가는 라면을 걷어올려 먹어야만 안쪽에 있는 라면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나름에 먹기 노하우다.

아직도 그때 먹었던 라면맛을 잊을 수가 없다.


해 전부터 난 요리가 재미있어졌다. 아내가 국물요리를 싫어하다 보니 미역국 된장국이 먹고 싶어 질 때는 직접 끊여 먹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육수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난 가끔 요리를 할 때 원하는 맛이 안 나올 때 라면수프를 넣는다.



특히 김치찌개에 넣으면 할머니가 끓여 주신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라면수프는 그런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엄마의 손맛이 먼데 있지 않았음을, 요리를 좋아하게 되면서서 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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