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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향기

다이얼세숫비누 이야기

by 둥이

어느 날 책을 읽다가 갑자기 그 향기가 생각이 났다.


난 그 향기를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는데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 "면도비누의 희미한 박하향은 내가 그곳에 머무르는 내내 내 볼에 남아있었다" 란 구절을 읽다가 번개처럼 그 비누향기가 생각났다.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홍차향기처럼,

그 비누향기는 오래전 그 공간으로 날 데려다주었다.


그 아이에게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났다. 그 향기는 아카시아 꽃향기를 닮아 있었다. 그때는 그 향기가 비누향기라는 걸 몰랐다. 그것도 필통처럼 생긴 노란색 다이얼비누,

그 비누는 아무리 써도 잘 닳지가 않았다. 은은히 퍼져 나가는 비누향기는 그냥 그 아이였다. 비누향기는 더 이상 비누향기가 아니어서, 어디서라도 그 냄새를 맡으면 그 아이가 생각이 났다.


사 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 온 남자아이는 노란색 잠바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아이는 모든 게 깨끗했고 단정했다. 무엇보다 그 아이는 은은한 좋은 향기가 났다.

그 향기는 교회 반주자 누나한테 나던 화장품 냄새와 비슷했다. 그 아이는 학용품도, 필통도, 쓰리세븐가방도, 프로스펙스 신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비싸 보이는 것들만 들고 다녔다.


그 아이는 얼마 안 가 친구들로 둘러싸여 자기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듯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공부도 잘해서 선생님의 칭찬도 자주 받았다. 난 그 아이와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 당시 우리는 한 시간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아마도 그 덕분에 난 그 아이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옥집 주변으론 감나무와 밤나무 살구나무가 심겨 있었다. 그 집은 마치 조선시대 지어진 고궁처럼 보였다. 그 시절 동네 대부분 집들은 파란색 스레트 지붕을 앟고 있는 똑같은 집들뿐이었다.


한 번은 엄마 심부름으로 그 할아버지네를 다녀온 적 이 있었다. 그때 그 집 화장실은 집 안에 있었다. 난 화장실이 급하다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난 우리 집 부엌보다 깨끗한 하얀색 타일로 깔린 화장실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난 세숫대야 옆에 놓여있는 비누로 손을 씻었다.


그 순간 난 알았다. 그 아이한테 나던 좋은 향기와 똑같은 향기가 내 손에서 나고 있었다. 비누거품을 내서 그 향기를 코로 가져갔다. 난 그날 손만 씻으려다 세수까지 하고 나왔다. 뽀드득 거리며 손 씻는 소리가 계곡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목둘레로 비누거품이 묻어 젖어 들어갔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 향기는 하루종일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은은한 그 향기가 너무 좋아 난 며칠 동안 옷도 안 갈아입었다.


그 이후로 난 다이얼비누를 보면 그 아이가 생각이 난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비누종류도 많아지고 샴푸도 많아졌지만, 난 그 노란색 다이얼 비누향기가 가끔 생각이 난다. 그 비누향기는 내게 그 아이를 데려와 준다.


그렇게 십 년이 훌쩍 지난 시간, 그 비누 향기를 잃어버린 어느 날, 논산훈련소 세면장에서 노란색 다이얼비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이얼세숫비누는 나라에서 지급되는 군면세품이었다. 아무리 써도 비누는 닳지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아 헤프기까지 했다. 세숫비누로 빨래도 하고 세수도 하고 목욕도 했다. 군대에선 세숫비누로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사용을 했다. 화장실 청소와 세면대 청소 그리고 바닥청소 관물대까지 비누하나로 웬만한 모든 것을 청소해 나갔다. 슬픈 일이지만 다이얼비누 향기는 더 이상 향기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 향기는 그냥 비누냄새로 바뀌었다.


지금도 가끔 난 그 비누향기가 생각이 난다. 그때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나던 비누향기는 다섯 손가락 마디마디에 스며들었다. 늘어진 목둘레로 젖어 들어간 비누거품은 그대로 말라 며칠간 은은한 향기가 되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난 그 향기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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