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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생각

by 둥이

"지금 이 순간은 파브리스의 일생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이때 만약 누군가가 감옥에서 나가게 해 주겠다고 했어도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것도 단호히!"

[파르마의 수도원 - 스탕달-]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쉬지 않고 나를 생각한다.


남들도 이렇게 자기를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거울 속에 있는 까만 눈동자를 끊임없이 바라본다. 그 수정체 안에 내가 있다. 그게 나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평소에 난 거의 갔던 곳만을 간다.

늘 다니던 식당을 가고, 거닐던 산책길을 걷고, 만나는 사람만 본다. 그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일수 있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 그런 중요치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런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난 지인들과 식사를 할 때도 입맛에 맞는 몇 종류의 음식만 번갈아 가며 먹고, 지인분들과 약속을 잡을 때도 늘 만나던 장소에서 만나고, 커피를 주문할 때도 늘 연한 아메리카노에 얼음 세 개를 추가해서 주문하고, 장을 보러 시장을 들를 때도 언제나 연두부와 두부를 먼저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것도 항상 먹을 양보다 더 많이 담다 보니 아내에 잔소리를 듣는 게 다반사가 되지만 이런 나의 습관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이런 습관을 가졌을 때 좋은 점은 내가 혹시나 약속 장소에 늦게 가더라도 좋아하는 연한 아메리카가 얼음 세 개를 추가하여 미리 나와있다는 데 있다. 항상 가던 곳 만 가는 게 이상할 이유도 없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만 찾는 사람들 입장에선, 이해하는데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대부분의 일상들을 아주 작은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어쩌면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쓰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마치 중력에 묶인 태양계 행성처럼, 궤도를 벗어나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정해진 위도와 경도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습관은 성격이 그래서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불량하지도 않았다. 중간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 커나갔다. 나는 그냥 심심한 보통의 아이, 튀지 않은 아이, 존재감이 없던 아이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거나 내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학업등수는 항상 중간보다 조금 앞서 있어서 얼핏 나보다 밑에 있었던 동창들을 오랜만에 만날 때면, 어이없게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의 이미지 때문에 놀라곤 한다. 친구에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이미지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와 비슷하다면야 놀랄 일도 아니지만, 나를 아는 친구들이나 오랫동안 보아온 지인분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의 이미지가 실제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을 때는, 왜 그런 이미지로 내가 기억됐을까를 심각하게 생각하곤 한다. 물론 그 차이가 나에겐 없는 유능함이나 리더십 혹은 유머감각이나 유쾌함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된다면야 매우 감사할 일이지만, 그 반대로 무능하고 유머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면, 일일이 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해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그런 이미지로 남게 된 이유를 생각하다가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지금도 난 지나간 수많은 내가 생각나고, 과거의 내가, 그때의 나와 마주하곤 한다. 오래전 용기 없고 비겁했던 내가 생각날 때도 있고, 내가 가진 재능 이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나갈 때의 내가 생갈 날 때도 있다. 희미한 기억도 있었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도 있었고, 지워진 기억도 있었다.


나는 가끔 사진 속에 방긋 웃고 있는 나를 찾아보곤 한다. 기억에는 없지만 난 하얀 천막이 쳐진 마당 한가운데서 사진 찍는 방향을 보며 웃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사진 끝트머리에 얼굴전체도 아닌 눈코입만 간신히 걸쳐있게 나온 사진임에도, 난 그 아이가 단번에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외할아버와 외할머니 앞으로 높게 쌓여 있는 한과와 과일상 그리고 그 앞으로 외삼촌이 절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기다란 나무기둥이 하얀 천막을 떠받치고 있었고 잔치상 주위로는 마을:사람들이나 먼 친척쯤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난 그때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그 사진 속에 아이는 내가 아니었다 해도 마냥 행복해 보였다.


스탕달의 소설 파르마의 수도원에서 파브리스처럼 지금의 나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사라진 삶의 열정은 다 어디로 갔는지 되새겨 본다. 아마도 종교는 그런 질문에 적절한 정답을 던져 주는지 모른다.


난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왜 저 골목길로는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나는 지금의 나일까 라는 질문은 왜 나는 그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 가지만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간 죽은 사람들이 보낸 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 왜 나는 나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쏟아 낸다. 이상하지 않는 그런 생각들은 나를 나이게 해 주는다. 잃어버린 나, 숨어버린 나, 잊힌 나, 열정적인 나, 그런 모든 언어 속에 얽혀 있는 나, 수줍어하는 나,


폴오스터의 소설 "4321"에서 주인공

퍼터슨처럼, 우리는 여러 종류의 "나"로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의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만나게 되고 우연과 우연이 만나 또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내고 그런 시간 속에 내가 있음을 난 안다. 그때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어찌 되었든 수많은 나도 역시 나일 테니까,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지금, 오늘 내속에 있는 나와 먼저 친해지는 것이다. 같은 말의 반복일 수 있지만 참 이게 쉽지가 않다는 게 문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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