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 농부의 봄날 이야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어제로 촘촘하게 이어진 수많은 순간이 오늘로 이어져 갔다. 내일이 올,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냈다.(.....)"
"어떤 시작이든 시작은 언제나 늦지 않다."
<아침산책 김용택지음 >
아흔 살 농부의 봄날
아버지는 농부다.
평생을 땅을 일구며 살았다.
아흔 살 농부는 일을 놓지 못한다.
겨울나듯이 봄을 나면 된다 해도
막상 봄이 되면 마음이 산산 해진다.
작년에도 농사가 마지막이라 했다.
올봄도 농사기 마지막이라 했다. 농사일을 놓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버지에게 농사는 세상의 전부다.
농사를 놓으면 찾아올 농부의 외로움이 슬퍼 보인다. 마음길이 막히듯 막막해진다. 마음 닿을 곳이 사라진다. 아버지는 흙을 일구며 마음도 일군다. 그래도 이제 놔야 한다. 그래야 한다.
봄은 농부에게 봄이 아니다.
농부에게 봄은 흙을 갈아 씨를 뿌리는 시간이다.
어느 봄날 오후 농부는 포슬포슬 해진 흙을 일군다. 동그랗게 고랑을 만들고 그 위에 검은 비닐을 덮는다.
봄이 오면 농부는 마음이 흩어진다.
손길 닿는 데가 많아진다. 손 닿는 곳이 많다 보니 발길도 바빠진다. 마르고 푸석한 땅을 다듬어 싱싱하게 만든다. 붉은색 젖은 흙으로 고랑과 이랑을 만든다. 그곳에 겨우내 생각해 두었던 작물들을 나열하듯 빼곡히 심어 나간다. 그건 마치 빈틈없이 계획된, 바둑판에 바둑알이 하나하나 채워져 가는 것과 같다. 흰 알과 검은 알이 번갈아 놓여도 거기엔 질서가 있고 이유가 넘친다.
먼저 채 봄이 오기 전에 씨감자를 땅속 깊숙이 심는다. 그 옆으로 상추씨를 조심스럽게 두세 고랑 뿌린다. 가벼운 상추 씨앗이 봄바람에 날릴까 비닐 덮개로 하우스를 만들어 준다. 아침저녁 흙에서 올라 분 수분이 이슬이 맺혀 다시 땅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작심한 듯 길게 늘어선 빈고랑 위로 고추 모종을 심고 고구마 줄기를 심는다. 남은 고랑엔 옥수수와 가지와 오이를 심는다. 방울토마토를 심고 강낭콩을 심는다. 고된 일이다. 농부는 긴고랑 심긴 모종을 보며 충분히 행복해한다.
봄볕이 진해질수록 농부의 얼굴은 타들어 간다.
흙을 사랑하는 농부의 얼굴이 봄볕에 그을려 흙색을 닮아간다. 밭은 농부의 쉼터가 된다. 고추모가 어른처럼 커나간다.
봄은 농부에게 계절이 아니다.
농부의 봄날은 고되지만 충분히 행복하다. 뿌린 씨앗이 고됨을 지워준다. 농부는 씨앗 속에 숨어있는 마법을 믿는다. 그 약속을 믿는다. 언젠가는 열매가 된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농부는 흙을 닮아간다.
흙은 정직하다. 거짓이 없다. 들인 만큼 준다. 한없이 정겹다. 농부는 그것만으로 행복해한다.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살다 보면 만날 행운을 기다릴 줄 안다. 쉬운 것 같지만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게 인생이다.
농부는 그렇게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머지않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