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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농부의 봄날 이야기 (時)

아흔 살 농부의 봄날 이야기

by 둥이

아흔 살 농부와 봄날 이야기


그는 올해도 말한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작년에도 그렇게 말했다.

그전 해에도.


그러고는

포슬포슬해진 땅을 손등으로 쓸어보고

검은 비닐을 조심스럽게 덮고

고추 모종을 심는다.

그 옆에 상추 씨,

그 옆에 고구마 줄기.

이마의 땀방울도

흙 위로 떨어진다.


빈고랑 위에 겨우내 생각해 두었던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는다.

그는 씨앗의 약속을 믿는다.

그는 기름진 흙과 햇살과 바람과 이슬이 씨앗을 길러줄 거라 믿는다.

태풍과 가뭄이 들 때도 있겠지만 뿌리는 풍성한 열매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나는 그에게 말한다.

“아버지, 이제 놓으셔도 돼요.”

그러면 그는

삽을 흙에 잠시 꽂은 채

허리춤을 두드리고 말한다.

“그래야지.”

하지만 그건

정말로 놨다는 뜻은 아니다.


봄은

우리에게는 산책이나 벚꽃이지만

그에게는

흙 속에 파묻힌 씨앗들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모든 뿌리와 잎사귀들이

그의 손가락보다 먼저

햇볕을 안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언젠가 아버지가

삽도 내려놓고

비닐도 덮지 않을 그 봄이 올까.

그날이 되면

그가 그토록 닮아가던 흙이

그를 아주 조용히 데려가겠지.


그리고 그 밭엔

토마토가,

고추가,

아버지가 남긴 질서대로

다시 자라날 것이다.


그건 어쩌면,

아버지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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