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생일자들의 슬기로운 사회생활
빠른 생일자들의 슬기로운 사회생활
이상한 일이지만 나라마다 나이의 기준이 다르다. 특히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나이가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관계 형성에 있어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한다. 두 명만 모여도 우리는 먼저 나이먼저 까고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를 결정한다. 그렇다 보니 원치 않게 빠른 생일자들은 많게는 위로 일 년 아래로 일 년을 친구로 사귀게 된다. 쉽게 말하면 여기 붙었다가 아니다 싶으면 저기에 붙을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다. 여기서부터 흔히 족보가 꼬이게 되는데, 어느 날은 친구에 친구분과 인사를 하게 되면 두 살 어린 동생일 때도 있다. 나하고 친구니까 너하고도 말을 놓아도 된다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프레임에 이상한 족보가 만들어진다. 그렇다 보니 대학에 들어가 학번과 나이라는 관계 형성에 기준점이 되는 양자택일에서 우리는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쉽게 학번을 대자니 삼수를 한 것도 그렇고, 빠른 생일이라 지금까지 만나왔던 친구들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사이에서 관계 정리가 꼬이게 된다. 비단 이런 빠른 생일들의 애환은 학창 시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에서는 이런 빠른 생일자들은 늘 어떻게 자기 나이를 소개해야 될지 갈등한다.
흔히들 이런 소개를 많이 한다. 그건 마치 협회에서 만든 암호 구호처럼 비슷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는 나이는 몇 년생인데요 제가 빠른 생일이라 몇 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처음부터 스펙트럼을 넓게 잡고 관계 정립을 하려는 사람들이다. 딱히 동생으로도, 형으로도 구분되지 않은 교란종이 탄생한다.
이런 빠른 생일자들의 애환을 지난주 어느 술자리에서 실감 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모임은 나이대가 초등학교 자녀를 둔 아빠들의 모임이어서 대략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중반까지 젊다면 젊은 아빠들의 모임이었다. 그 모임에서 어떡하다 보니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 축에 속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님이 한분 있었는데 그분은 70년 개띠였고 난 그분보다 두 살 아래였다. 우리 두 명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대부분 80년대 생들과 70년 후반대 태어나신 아빠들 이였다.
아빠들 ( 남자들은 더 심한 편이라고 생각되는데) 남자들은 어디에서나 둘 이상 모이게 되면 빠뜨리지 않고 먼저 나이를 까고 관계를 맺는다. 그다음 조금 더 이야기하다 보면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로 전개되어 나간다. 아무리 많이 만나도 만남의 횟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모임이 지난주에 있었다. 그 모임에 한분이 약간은 내성적으로 보이는 아빠가 있었다. 올해 처음 우리 모임에 들어와서 인사도 몇 번 나누었다.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들어와 앉은 그분이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자 말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눈인사만 나눴던 정도라 그분이 그렇게 재미있는 분이란 걸 처음 알게 됐다.
그분은 갑자기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집안에서 그래도 할 소리는 하고 남자노릇 하면서 지낸다고 말을 했다.
순간 술자리는 일순간 조용해졌다. 모임의 성격상 대부분 아내에게 꽉 잡혀사는 착한 아빠들이 대부분 이였던 터라 그분의 말이 솔깃했을 것이다.
나 또한 부럽다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며 두 테이블 옆에 있는 그분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분은 아내분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년 후배라고 했다. 자기 말 한마디면 껌벅 죽는다며 핸드폰을 꺼내 확인 전화를 해도 된다며 당장 번호를 누룰 기세였다. 이쯤 되면 모두 그분이 어느 정도 취기와 객기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하는 소리려니 하고 이해를 하고 있었다.
술 두어 잔이 더 들어간 그분은 얼굴이 불그스레 해졌다. 그리고 자기 아내가 자기 보다 두 살 어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고 했다. 아내가 빠른 생일이어서 실제로는 한 살 어린데도 자기는 나이 어린 게 좋다면 두 살 어리다며, 고등학교 이후로 계속 그렇게 빠른 생일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 아내와 살다 보니 아내와 같은 빠른 생일자들이 피라미드처럼 건강하게 자리 잡혀 있는 먹이사슬 피라미드를 교란시키는 생태계교란 종이라며, 없어져야 된다고 했다.
와 난 이 대목에서 박수를 쳤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먹이사슬과 생태계 교란종 이란 생물학 단어를 처음 들어서였을까?
분명 국문학과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빠른 생일을 가지신 분들을 뭉퉁그려 생태계 교란종이라고 이야기하는 인문학적 표현이, 너무 아름답게(?) 들렸다.
그분은 띠동갑 동생이었지만, 생태계교란종에 대한 식견만큼은 나보다 형 다웠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영역이라서 그랬을까 그래도 조금 다행인 건 지난 정부에서 만 나이로 모든 민관 행정기관을 통합관리 해나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이런 이야기는 진화되어 없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아내도 빠른 2월생 이였다. 아내는 원래 나이로 학교를 다니고 지금까지 그 해년도의 아이들과 친구관계를 맺고 있다.
12월에 태어나 두 달 밖에 차이가 안나는 분들 중에 그렇게나 자주 만나는 언니라는 분도 있었다.
그분은 정확히 두 달 언니인 셈이다.
우리 생태계야 어찌 되었든, 생태계 교란종은 오늘도 여기저기 늘어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