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미술관에서 사람 구경하기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게 미술관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미술관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미술관을 간다는 건 거리가 가까운데 있다든가 먼 곳에 있다든가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아무리 가까운데 있어도 평생을 한번 갈까 말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술관은 그런 곳이다.
좀처럼 가지지 않는 곳, 꼭 필요한 생필품을 파는 곳도 아니어서, 어쩌면 미술관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쉽게 갈 수 없는 장소 일 수도 있다.
요즘은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 하기도 한다. 길게 줄을 서서 무엇을 보는지도 모른 체 긴 줄을 따라가고 있는 학생들도 있다.
그렇게 준비하고 나선 연휴 첫날, 우리는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줄지어 서있는 차량들 속에 섞여 있었다. 한 시간 정도면 들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차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런 시간들은 이상하리만치 정지해 있는다. 움직이지 못하는 차량만큼, 시간도 꼼짝을 하지 않고 느리게 흘러간다. 한 시간이 한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10분이라도 정체된 차 안에서, 그것도 도착 3km 전 주차봉을 흔들며 지나가는 주차 단속원이 족히 3시간은 걸릴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그 10분은 정확히 10분으로 느껴질 수가 없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처럼 시간은 어느 장소 어느 시차에서는 길게 타원형으로 늘어난다는 절대진리를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책으로 배울 때는 들어도 알 수없었던 상대성이론을 이렇게 쉽게 터득할 줄이야,
여하튼 주차단속원의 3시간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우리는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왔다. 미술관을 포기하고 그래도 나온 김에 영화관으로 향했다. 무엇이라도 충족해야만 했다. 그렇게 연휴의 하루를 보내고 주말 아침, 우리는 다시 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4번 출구로 올라와 셔틀버스를 탔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제 그렇게 고생해서 갈 수 없었던 미술관이었다. 오늘은 정확히 한 시간도 안 돼서 우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젊었을 때 몇 번 아번 미술관이었다. 그때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미술관의 걸려있는 그림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주변에 많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런 것도 나이가 들수록 변해간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자 백남준작가의 비디오아트가 마치 거대한 바벨탑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수많은 브라운관을 쌓아 올린 탑모양의 예술품이었다. 사람들은 주의로 모여들여 사진을 찍었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다양했다. 우리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도 있었고, 데이트를 하러 나온 젊은 남녀와 황혼의 로맨스를 불태우는 어르신들과 우르르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중고등학생들과 한점 그림 앞에서 족히 한 시간이 넘게 예술품을 관람하는 문화인들, 여러 부스를 돌아다니며 걸려있는 그림보다는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을 보는 게 더 재미있었다. 아내와 아이들 몰래 (이런 걸 몰래라고 표현해야 되는 건지 모르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상착의와 그 사람의 직업과 생김새를 훑어본다. 마치 대단한 초상화라도 그릴 듯히,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 앞에는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들이 있었다. 경비원들은 그림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왼쪽으로 돌아가서 직진하세요 라는 말과 그림 앞으로 다가서지 마세요 라는 두 종류의 말을 하였다.
난 경비원들을 보면서 며칠 전 읽었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소설이 생각났다. 소설 속 경비원들과 현실 속 경비원들은 그림 앞으로 다가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향해 똑같은 말을 하였다. 소설이나 현실이나 다르지 않았다. 소설이란 게 현실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거란걸, 소설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경비원들은 하얀 마스크를 쓰고, 똑같은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
간혹 나혜석화가 그림은 어디에 있나요라고 물어보는 관람객들의 질문을 받고 그날 처음으로 말을 한 경비원도 있을 듯했다. 경비원들은 하루 종일 앉아있기도 하고 서있기도 했다. 몇 군데 전시실을 돌아다녀 보니 앉아있는 경비원들이 더 많았다.
순간 직업으로써 미술관 경비원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 직업, 건강한 두 다리로 정해진 구역에서 그림을 바라보는 직업, 미술관을 찾아오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직업, 한마디로 멍 때리기 좋은 직업, 나쁘지 않은 직업 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보수만 맞는다면 (내가 그 보수에 맞춰야겠지만)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직업이다.
너무나 개인적인 거지만 벽에 걸려 있는 그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사람 구경이다.
나에겐 사람구경 보다 재미난 것은 별로 없다. 미술관에서 보라는 그림은 안 보고 이리저리 그림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을 바라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