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닮아가는 가족이야기
걸음걸이까지 똑같은 아빠와 딸이야기
가끔 누구와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건 유명한 인물이거나 동물(개나 고양이나 말을 닮아서 고양이상이거나 말상이라는 관상학이 있음) 사물일 때도 있고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영웅일 때도 있다. 대부분 유전학적으로는 엄마 아빠를 닮는다. 그건 너무 당연하다. 그렇다 보니 외모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재능적으로 우리는 타고나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유전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나 야구선수를 닮았다는 소리도 듣게 된다. 물론 그럴 소릴 들어보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얼굴이 닮았다든가, 목소리를 닮았다든가, 오죽하면 똑같이 노래 부르는 모창 예능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진다. 그것도 시청률이 꽤나 높다.
살아가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건 목소리일 때도 있고, 어떤 특정한 신체부위 그러니까 눈매라든가, 비율이라든가, 목소리라든가, 말투라든가, 이상하게 그런 건 순간적으로 알 수가 있다.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는 나와 닮은 사람을 우리는 자석이 끌리듯 서로를 알아본다. 친해진다는 건,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건 참 신기한 일이다.
난 어렸을 때 가끔 영화배우 봉태규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 그런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누구와 닮았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선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역인지 모른다. 어쩌겠는가 닮았다는데,
그날도 난 성당 앞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들을 성당으로 들여보내고 두 시간 남짓 남은 시간을 방해받지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에 방해가 되다 보니 찾게 된 장소가 그 카페였다. 그렇다고 그 카페가 성당분들이 전혀 드나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구석진 장소에 웅크리고 앉아 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여름으로 치닫고 있기라고 한 것처럼 뜨거운 햇볕이 카페창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페 통유리 앞으로는 인도가 있었고 그 사이로 이차선 도로가 있었다. 이차선 도로는 차 두대가 간신히 오고 갈 정도로 비좁았다. 마을버스라도 지나갈 때면 맞은편 승용차는 잠깐 서있다던가 서행을 해야만 했다.
그런 풍경을 카페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 것을 오롯이 즐기는 재미란, 소확행,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란 그리 크지가 않다. 이런 시간과 이런 풍경을 내게 선물로 준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 가끔 인도와 붙어있는 이차선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미어캣이 두 발로 서서 먼 곳을 쳐다보듯이, 햇볕을 받아 눈부신 동공을 그곳에 멈춰 세웠다.
그때였다. 한 분의 남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차선 도로 건너편의 인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분의 걸음걸이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래 분명히 어디선가 굉장히 많이 보았던 친숙한 걸음걸이였다.
그렇다고 절뚝거린다던가, 엉거주춤 걷는다던가, 특이할 만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영화처럼 걸어가는 그분의 옆모습이 보였을 뿐이다.
특이하다고 하면 특이했던 것은 그분의 두 팔은 바지 재단선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걸음걸이에 맞춰 앞뒤로 움직여야 될 두 팔의 자연스러움이 없었다. 오른발과 왼발의 속도는 마치 궁중무예를 하는 고수처럼 공중위를 걷듯이 상체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선은 전체적으로 거북목처럼 앞으로 나와 있었다. 머리는 주변을 한 번씩 쳐다보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홍콩영화 강시 같았다. 그 순간 난 그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차선 옆 인도를 걷고 있는 그분의 걸음걸이는 분명 성당 초등부 아이의 걸음걸이와 닮아 있었다.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일 정도의 걸음걸이였지만, 몇 년을 계속 봐왔던 터라, 그렇게도 걷는구나라고 볼 수 있었다. 편견은 이런 데서 아주 쉽게 생겨난다. 다름을 다르게 보지 않는다. 세상에 걸음걸이까지 그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난 카페에서 책을 내려놓고 한참을 생각했다.
단순히 걸음걸이만을 보고 나서 난 그 두 사람이 아빠와 딸일 거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주 후 나는 성당 앞에서 아빠와 딸 그리고 엄마까지 다섯 명의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완벽한 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아빠와 딸들 이였다.
분명한 건 아빠가 그렇게 걸으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빠와 딸은 알고 있을까 걸음까지 똑같다는 것을, 아마도 내가 눈썰미가 있다거나 기억력이 좋은 것도 아님에도 이렇게 알 수가 있을 정도니까, 두 사람은 걸음걸이가 정말 똑같으시네요 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DNA란 참 묘한 데서 티가 난다. 피검사를 해보지 않고도 혈육임을 알 수가 있는 건 비단 얼굴생김새뿐만이 아님을 다시 알게 된다. 심지어 가끔 밥을 먹을 때 실감 나게 느끼는 게 있는데, 식습관은 무서울 정도로 닮아간다. 숟가락을 쥔 손가락의 방향과 젓가락 질 같은 보이는 것을 떠나서, 짠 음식을 좋아한다던가, 짠지와 오이지를 좋아한다던가, 아니면 국물을 싫어해서 맨밥에 건반찬으로만 밥을 먹는다던가, 찬밥에 물 말아먹는다던가 하는 식습관은 오로지 그냥 좋아서 개인의 습관으로만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건 한국인의 오랜 유전자 속 김치와 마늘이 녹아들어 있는 것과 조금은 비슷한 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를 알지 못하는 누구라도, (우리 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누구의 아빠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 그런 닮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혈육임을 알게 해주는 외모를 떠나서 말이다. 그런 건 손동작이라든가 몸짓이라든가 눈짓이 라드라,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투나 자주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 지도 눈여겨본다면, 엄마의 스타일까지 알 수 있듯이,
그래도 적어도 나에겐 이런 희망이 있다면(그래도 이런 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닮기를 바라는 점들이 있다면) 책 읽기와 글쓰기 정도가 아닐까 그게 뭐 대단한 거는 아니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데 있어 글쓰기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닮았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의 인생은 B와 D사의 C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우리란 존재의 실체는 우리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탄생과 죽음은 우리의 선택영역 밖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라는 순간은 우리가 선택한 선택의 총합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인생을 수긍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누구와 닮았을까,
나는 누구의 걸음걸이와 닮았을까,
우리 아이들은 나의 걸음걸이와 닮았을까,
적어도 나의 걸음걸이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