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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약과 관절약 덤으로 위장약을 먹는 사람들

고봉약 한 그릇을 먹는 사람들 이야기

by 둥이

혈압약과 관절약 덤으로 위장약 -

고봉약 한 그릇을 먹는 사람들 이야기


오늘도 난 늙어간다.

어제도 늙어갔고 또 내일도 늙어간다. 수치적으로 얼마나 늙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난히 일이 많고 피곤한 날은 더 많이 늙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 흐른다는 건 늙는다는 것 밖에 없는 좋을 일 하나 없을 것 같은 나날인지도 모른다.


그완 반대로 우리 아이들은 오늘도 성장하고 내일도 성장한다. 너무나 자명한 이 사실은 슬플 일도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 슬픈 일이다.


생리학적으로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어느 순간을 지나면서 달리기를 시작하듯 늙어간다. 피부과 교수로 유명한 한 의사는 사람은 성장이 멈추는 그 순간부터 늙어간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사람은 어느 순간이 되면, 거짓말처럼, 성장을 멈추고, 몸에 있는 수많은 피질과 털들이 조금씩 떨어진다. 그렇다 보니 늙어갈수록 사람한테는 향기보다는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라면 좋겠지만, 암모니아 향 같은, 그냥 노인냄새를 풍겨낸다.


그렇다 보니 늙어 갈수록 이것저것 몸과 마음에 챙겨주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그중에 하나가 약이다.


예외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먹어야 하는 약이 늘어난다. 몸에 좋으라고 먹는 게 약임에도, 약을 약처럼 먹지 못한다. 젊었을 때는 기껏해야 먹는 약이라곤 일 년에 한두 번 감기약이 전부였다.


그것도 병원처방전이 필요 없는 쌍화탕과 만통 통치약 게보린 정도가 전부였다. 시대가 좋아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건 챙겨 먹어야 하는 약들이 점점 많아져만 간다. 그걸 먹지 않는 날엔 당장 죽기라도 할 것처럼, 정확히는 죽음이 성큼 앞으로 당겨진 사람처럼, 하루이틀 아니 몇 달을 사채빚 불어나듯 남은 생명도 그렇게 늘어날 것처럼, 약을 먹는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는 감기는 병도 아니어서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거나 열이 나는 증상이 있어도 남들에게 옮길까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기쯤이야 다 옮겨질 수 있는 병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서, 온몸이 욱신거려도 술을 마시러 나가거나 모임에 참석했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다. 코로나로 인해 바이러스 전염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만큼 걸리면ㄷ 죽을 것 같다는 공포는 이미 사라졌다.


그때 우린 전혀 다른 약을 처방받아 전염병의 차단을 막아야만 했다. 백신과 진통제와 해열제 그리고 다시 일차백신과 이차백신과 삼차백신을 맞아야 했다. 긴 면봉으로 코를 쑤시고 코로나에 전염되었는지를 기다리는 그 몇 분 동안의 기다림은 살아오며 겪어본 어떤 기다림보다 간절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나이 들수록 챙겨 먹어야 할 약들은 고봉밥처럼 점점도 많아진다.


고봉밥 먹듯이 챙겨 먹은 약 중에는 혈압약과 관절약이 있다. 혈압약과 관절약은 안 먹으래야 안 먹을 수 없는 생존 필수품이 되었다. 약도 주사가 아니어서 위장에서 소화를 시켜야 되다 보니, 위를 보호해 주는 위장약도 개수가 점점 늘어난다. 식전 식후 하루 세 번씩 챙겨 먹는다. 밥보다 더 밥처럼, 4인용 식탁 한쪽은 약봉지로 채워져 있다.


부모님은 이제 보건소와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종류만 해도 대여섯 종류가 넘는다. 여든 살이 넘어서면서부터 치매약도 처방받았다. 한 가지라도 빠지거나 실수로 못 먹게 되는 날이면, 안절부절못하며, 성질 급한 엄마는 혼잣말로 화를 낸다.


마흔 중반이 넘어서부터 건강검진을 받으면, 보건복지부에서 관리하는 혈압과 고지혈증이 높다며 약처방을 받으라는 독촉장 아닌 독촉이 카톡과 우편으로 날아온다. 마치 빗독촉을 받는 사람처럼, "아 혈압약을 먹어야 되는구나" 하며, 약을 싫어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주술에 매인 사람처럼 약처방을 받는다. 뇌는 건강문제에 너무 쉽게 허용하고 세뇌당한다.


무엇을 하든 꼼꼼하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것까지 챙기는 사람들은, 처방전의 약이 제대로 나왔는지, 약을 먹을 때마다 알약의 모양과 색깔과 효능에 하나하나 확인을 한다. 그런 건 모든 생활에서 묻어나 숨겨지지 않는다. 하나라도 빠진 게 있는지, 혹시나 중복되는 약은 없는지, 수험생처럼 작은 글씨 하나를 놓치지 않는다. 아내의 이런 성격은 장인어른의 꼼꼼함을 빼다 박았다. 작은 것 하나를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허술함과 커다란 빈틈은 바람 한점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꼼꼼한 아내가 버티고 서있서서 인지 모른다. 아내는 나의 그 빈틈을 깔끔하게 메꿔준다. 마치 새것처럼,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티 안 나게 만져주고 고쳐준다. 완벽한 맞춤 처방전이다.


아직은 다행인 건지, 아니면 지금도 위험한 건지 모르겠지만, 혈압약과 고지혈증 치료를 위해 처방된 알약을 한알 매일 아침 먹는다. 이것도 아내의 처방이 의사의 처방보다 빨랐다. 어쩌면 나란 사람은 의사의 처방전보다는 아내의 처방전이 더 신뢰하고 효능이 있는지 모른다. 사람마다 약효가 같은 건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건강검진 수치는 정삼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앞글자가 "고" 자가 붙으면 혈압도 고혈압이 되어버린다. 혈압약을 먹고 난 후 난 고혈압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눈을 뜨면, 화장실을 가기 전에 주방에 들려 혈압약을 한알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그리고 물 한잔을 따라 마신다. 약을 먹으면서 하루의 루틴이 시작된다. 어두운 방안에 전원이 켜지듯이, 학교종이 울리는 것처럼, 내 몸의 신체는 지난 이 년간, 혈압약이 위속으로 들어오면, 감각센서가 "하루가 시작됐습니다"라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행복한 하루가 시작되었어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고봉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부모님들과 나의 하루가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아간다. 그걸 먹어야만 건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보다는, 그걸 먹어야 남아 있는 생이라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으로, 고봉 약을 먹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복지부의 관리 수치에서 벗어난 항목들엔 의사의 처방이 늘어갈 것이다. 그러다 뼈가 약해지는 어느 순간이 되면, 나도 부모님처럼, 식탁 한편에 고봉 약을 수북이 쌓아놓고 먹을 것이다.


늙는다는 건, 아주 단순하다.

약과 친해지는 것, 약을 밥먹듯이 먹어야 하는 것, 생각해 보니 고봉약을 먹을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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