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서울 남자와 함께한 가을 여행 이야기
합이 잘 맞는 부부가 있다. 속궁합까지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 부부에게는 환상적인 티키타카가 눈에 보인다. 마치 시간을 들여 대본을 외운 연극배우들처럼 그들 부부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말에 틈새를 놓치지 않는다. 부부의 대화는 노련한 예능 작가가 써놓은 대사처럼 들린다. 듣고 보면 벌써 대여섯 번 들었던 이야기인데도 언제 들어도 유쾌해진다.
큰 키에 덩치가 좋은 남편은 반나절만 지나도 턱밑 수염이 새싹처럼 올라오는 게 싫다며 재모 시술을 받았다. 잘 다듬으면 제법 멋진 구레나룻과 잘 어울려 그런대로 보기 흉해 보이지 않았지만( 정확히는 남들이 그 정도로 어느 남자의 턱밑 수염을 자세히 쳐다보지는 않지만) 나름 자기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어서, 어느 날 재모 시술을 받고 있다며 한쪽 손으로 턱밑을 문질렀다.
큰 키에 덩치도 좋은 사람이 얼굴에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있다고 생각하면 대충은 이 사람의 이미지가 안 보고도 그려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저분은 분명 서울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기에 충분한 외모를 가졌기에 평소 자기는 서울 남자라고 위트 있게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언제 서울 남자라고 던져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피싱 포인트를 알고 던지는 노련한 낚시꾼처럼,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둘러보다가도, 자신은 생긴 건 이래도 흰쌀밥 한 그릇 외에는 다른 군것질을 안 한다며, 자신의 식습관을 알려주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달달한 커피와 빵집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과는 다른, 자기는 서울 남자라며, 다시 한번 강조를 하였다.
반전남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투박한 외모와는 달리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은 여행지를 알아보고 일박 이일의 여행 일지를 작성해 단톡방에 올릴 때 빛을 발했다. 이 정도로 자세하게 PPT 파일로 정리를 하다니, 여행사에서 받아본 여행 일정표가 밀리는 순간이었다.
시간별 장소별 각각의 장소에서 맛집과 주문할 음식과 이동 장소와 도착시간까지 어디 하나 부족한 데가 없었다. 사람은 역시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남편분이 이 정도로 꼼꼼하다 보니 아내분은 거의 남편의 가이드 아래 움직인다.
작지 않은 키에 단아한 외모 물이 고일 정도로 깊이 팬 보조개 이국적인 미모를 지닌 아내분은 언제나 남편분의 짓궂은 농담에도 쿨하게 반응한다. 오랜 기간 숙련된 내공이 빛을 발한다. 어지간한 농담에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외모가 자신을 닮아 다행이라는 남편분의 농담에도,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생각이라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관상학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면밀히 분석을 해봐도 이국적인 아내의 유전자가 많은 일을 했다는 건 아이들의 외모가 말해준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남편은 꿋꿋하게 다 자기 덕분이라고 농담을 던진다.
서울 남자로서 부족함이 없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외모의 남편분은, 곤충과 벌레를 싫어해서, 싫어하는 차원을 넘어서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아이들이 잡은 매미나 가재도 손으로 잡지 못하는, 소심한 면도 있다. 바퀴벌레도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잡고 모기나 파리도 손으로 잡아 해치우는 보통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백마 지기 농사도 거뜬히 해낼 것 같은 머슴 같은 외모와는 달리, 장인어른의 텃밭 농사를 도와드리다 앓아누울 정도로 힘에 부쳤다고 하니, 이 또한 서울 남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부분이다.
어쩌면 모든 상황과 정황이 서울 남자의 필요충분조건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여서 뭐라 부정할 말은 딱히 없었다. 딱 한 가지 서울 샌님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것만 빼면 완벽한 서울 남자였다.
이런 부부와 가을여행을 다녀왔다.
한 시간만 벗어나도 바다와 섬을 불 수가 있다는데 다시 한번 감동을 받으면서, 이럴 땐 거리감은 사라지고 보이는 데로 생각한다. 제부도의 작은 섬들은 밑물과 썰물로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발밑까지 밀고 들어온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찰랑거린다. 갯벌은 하루 두 번 생태계 순환을 하며 우주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행복이란 참 단순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감정이 흐물흐물해진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던 현실이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초콜릿의 시간이 된다. 그런 시간 안에 그냥 풍경처럼 존재하면 된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산책을 하고, 갈대숲을 거닐다 보면, 밀물처럼 밀고 들어오는 묘한 감정 속에 잠겨지게 된다.
행복은 그렇게 존재한다.
가을 풍경처럼, 함께여서 행복한 가을여행,
서울 남자와 함께한 가을여행은 더없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