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커덕 쿵 덜커덕 쿵
세탁기를 돌리고 있다. 세탁기 안에서 덜컹덜컹 부딪히며 돌아가고 있는 것은, 한 남자의 몸이다. 투명한 플라스틱 문 너머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날 바라보는 그 눈. 생기를 잃은 까만 구슬 같은 두 눈.
그 눈 속에서, 죽은 추억이 빛을 잃어간다.
이 남자를 처음 만난 것은 11월의 일이었다.
그날 나는 절벽 위에 서서 산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집에 할머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모도 있었고, 동생도 있었다. 하지만 고모도, 동생도, 할머니보다 훨씬 일찍 죽고 말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는 걸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나를 맡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들만 있는 그 집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행복했으니까.
고모는 항상 제멋대로 굴었고, 동생은 도저히 철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수를 내가 수습하고 다녀야 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 배웠으니까.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예의를 지키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동생이 장난으로 내 신발에 면도칼을 넣었을 때도, 고모가 실수로 끓는 물을 내 얼굴에 끼얹을 뻔했을 때도, 할머니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가르쳤다.
예의를 지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누군가는 그것을 세뇌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설사 세뇌라 하더라도, 그 덕에 행복했던 건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축복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배운 것을 지키며 행복을 느꼈다.
사실은, 할머니에게 칭찬받는 것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정말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그리도 좋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얼굴이 검게 변해가는 고모를 돌보며, 행복했다.
도저히 음식을 삼키려 들지 않는 동생에게 억지로 밥을 먹이며, 행복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나날들.
영원히 변하지 않을 날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몰랐다. 우리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어째서인지 여자들만 있는 집. 돌이켜보면 자연스럽게 여자들의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뭔가 결여된 느낌. 뭔가가 억지로 잘려나간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다 자랐을 때는, 마지막 남은 할머니마저 죽어가고 있었다.
평생 나를 자상하게 대해주었던 할머니는, 죽기 직전에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다. 나를 쓰다듬어주던 자상한 손길은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따스하게 지켜봐 주던 할머니의 눈은, 아주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마치,
아주 더러운 것을 보듯이,
아주 무서운 것을 보듯이
복잡한 심경과 저주가 실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죽기 직전의 단 한순간이었다. 이미 자신의 생명이 종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그 끝을 돌이켜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이렇게 너를 두고 가면 안 되는데...”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고모와 동생이 그랬듯, 할머니의 시신도 화장했다. 할머니의 몸 대부분이 연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고, 나는 한 줌 남은 가루를 들고 산에 올랐다. 그리고, 절벽 위에서 뿌렸다. 11월의 절벽 위에서.
손을 떠난 할머니의 가루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것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지, 바람에 실려 날아갔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소금이 바닷물에 녹아버리듯, 바람에 녹아 사라졌다.
사라진 할머니의 잔영 대신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낙엽이었다. 절벽 위 커다란 나무에서 떨어진 커다란 낙엽들이 천천히 흔들리며 내 머리를 지나치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갔다. 나는 그 낙엽의 춤사위에 홀려 멍하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할머니가 죽었다는 사실도, 방금 할머니의 몸을 모두 절벽 아래로 떠나보냈다는 사실도 잊고, 나는 낙엽에 홀렸다.
점점 많은 낙엽이 떨어지며, 어지럽게 흔들린다. 소용돌이처럼 돌면서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낙엽에 주의를 빼앗기는 바람에, 내 몸도 점점 아래로 굽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내 몸을 등 뒤에서 끌어안은 그 순간에야 나는 겨우 내가 절벽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칫하면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 남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던 사람은 건장한 사내였다. 단단한 몸, 다부진 얼굴... 하지만 그 굵은 팔에서 어쩐지 검고 말라비틀어진 팔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쭈글쭈글한 얼굴이 그 얼굴에 겹쳐 보였다.
어쩐지, 할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남자의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 보여준 그 눈빛. 나를 걱정하는 눈빛. 조금씩 꺼져가던, 까만 눈...
“...괜찮으세요?”
아마도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괜찮냐고 묻는 남자의 말에, 나는 대답 없이 돌아서서 남자의 몸을 껴안았다. 힘껏 껴안았다. 마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듯이. 무게를 실어 내맡겼다.
나에겐 마지막 한 사람이었던 할머니의 품.
이 품은,
이 온기는,
닮았다.
할머니를.
그것은 한편으로, 내가 남몰래 가슴 깊은 곳에서 원해왔던 그런 온기였다.
남자와 깊은 관계에 빠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행복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행복과는 다른, 그런 행복이었다. 남자는 내 신발에 면도칼을 넣지도, 끓는 물을 내게 붓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넘어질 것 같으면 부축해 주고, 나의 눈치를 살피며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었다.
내가 모르는 행복.
어쩌면 내가 동생에게,
고모에게,
할머니에게 주었던 행복.
그 생소한 행복이 내 몸을 뜨겁게 감쌌다.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내 몸 구석구석을 옭아맸다. 그랬으니까, 그랬으니까...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이제는 사리 분별을 할 나이가 된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죄책감도 없었다.
잠시 빌릴 뿐이다.
이 품이 없어도 괜찮을 때까지.
나는 그 빌린 몸을 탐하며 수없이 안기고 안겼다. 남자의 눈에서 열정이 식고, 남자의 품에서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걱정하던 눈이, 따뜻한 눈이 흐리멍덩해지고, 따뜻하게 나를 다독여주던 손에서 온기가 사라지고 욕정만 남을 때까지.
그 남자가 텅 비어 가는 것과 반대로, 내 마음은 점점 충만해졌다. 그 끝이 다가올수록, 내 몸은 따뜻하게 데워져 갔다.
...쿵
세탁기가 멈췄다. 다 돌아갔다는 뜻의 멜로디가 울렸다. 세탁기 문을 열자, 툭 하고 문 밖으로 뭔가가 삐져 나왔다.
남자의 머리, 그리고 오른쪽 팔. 길게 뽑혀 나온 혀가 입술 밖으로 늘어져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남자의 몸을 꾹꾹 밀어 넣었다. 다시 세탁기 문을 닫고 세탁 버튼을 눌렀다. 남자의 흐린 눈동자 위로 깨끗한 물이 쏟아진다.
덜컹덜컹 돌아가는 남자의 머리를 보며, 나는 드디어 내가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걸 사무치게 느꼈다.
남자의 몸은, 아무리 세탁기를 돌려도 도무지 깨끗해지지 않는다. 이래선 안 된다.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던 사람, 이제 돌려주어야 할 사람.
빌린 것은 깨끗이 쓰고 돌려주어야 한다. 나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배웠다. 나는 할머니의 가르침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배를 쓰다듬었다.
내 아이에게도 가르쳐줘야지.
틀림없이 딸일 것이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덜컹 쿵 덜컹 쿵
남자의 머리가 세탁기 속에서 계속 부딪힌다. 세탁기 속을 빙글빙글 돌면서, 죽은 추억이 나를 바라본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너를 두고 가면 안 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걸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어째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