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은 길다. 서울 북부와 남부를 가로지를 뿐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아는 짧은 세계의 양쪽에는 엄청나게 긴 노선이 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던 전철 안은 그 긴 노선에 다가갈수록 점점 비어 가고, 종점에 거의 다 왔을 때는 칸마다 두세 명 정도가 앉아 있을 뿐이다. 그 공간은 무서울 정도로 한적하다. 특히, 밤에는.
그 한적한 세계는 나의 퇴근길이다. 야간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나면 전철도 막차가 들어올 시간이 된다. 우리 집은 종점에 있다. 바글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나면 전차 안에는 으스스한 한기가 돈다. 그 시간대에는 고정 멤버가 있다. 나와, 또 한 사람의 남자. 매번 보는 얼굴이다. 대학생 정도일까? 아마도 나와 비슷한 처지겠지. 서로의 얼굴은 익숙하지만 아는 체는 하지 않는다. 앉는 자리도 정해져 있다. 건너편의 살짝 떨어진 대각선 자리. 각자 언제나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우리의 불문율이다.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잠이 오든 오지 않든 간에. 종점에 도착하면 남자가 먼저 내리고, 그다음에 5초 정도 기다렸다가 내가 내린다. 한 번도 길에서 그를 마주친 적은 없다. 오직 이 전철 안에서 뿐이다.
물론 언제나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다른 사람들이 탈 때도 있다. 대개는 술에 취했거나 뭔가 급해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가끔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 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가끔 실눈을 떠서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딘가의 널찍한 빈자리에 가서 앉거나 눕거나 한다. 대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딱 한 번,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노인이었다. 솜이 터진 겨울 재킷을 입고 시름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온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등이 심하게 굽었다. 그리고 손에는 수박을 들고 있었다. 그물망에 담긴 수박을. 나는 그 모습을 실눈으로 살짝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였다. 귀로 노인의 기척을 느끼면서, 멀어지길 기다리면서. 어딘가 멀찍한 자리로…….
하지만 노인은 그러지 않았다. 발소리는 가까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바로 앞에 노인이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릎에 기척이 느껴질 정도로 바싹 다가서서. 왜일까. 내릴 정거장이 바로 다음이라서 앉을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굳이 왜 내 앞에.
신경 쓰였지만 귀찮았다. 눈을 뜨기도, 고개를 들기도. 그대로 눈을 감고 자는 체하고 있었다.
툭. 툭.
잠이 오지 않았다. 거슬렸다.
툭. 툭.
내 무릎을 수박이 자꾸 건드린다. 툭툭, 친다. 짜증이 나서 고개를 들까 생각했다가 갑자기 겁이 확 났다.
툭. 툭.
규칙적이다. 수박이 내 무릎을 치는 박자는. 버스라면 모를까, 전철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수박은 내 무릎을 규칙적으로 툭툭치고 있다. 설마 이 사람, 일부러? 일부러 내 무릎을 수박으로 툭툭 치고 있는 것일까. 왜? 왜일까. 안 자고 있는 거 다 알아…… 그런 뜻일까? 아니면 깨우려는 걸까? 몸에 오한이 돋고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이 사람, 내게 뭘 하려는 걸까…….
무릎에 수박이 계속 부딪혀서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할 때쯤, 그것은 뚝 멈췄다. 그리고 기척이 멀어져 갔다. 실눈을 뜨고 엿보니 노인은 내 대각선 맞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나와 함께 이 전차에 타는 그 남자를 향해서. 노인은 그 남자 앞에 멈췄고 수박을 흔들기 시작했다. 툭, 툭…….
공포가 조금 사그라들자 나는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도대체 뭘 하는 걸까 저 사람은. 계속해서 수박망을 흔들며 남자의 무릎을 수박으로 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수박망이 아니었다.
빨간, 머리카락 뭉치였다. 머리카락 뭉치 안에 들어있는 건 사람의 머리다. 노인은 잘린 머리를 그 머리에 달린 머리카락으로 감싸 들고 있었던 것이다. 툭, 툭하고 그 머리를 흔든다.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돌아보지 않을까. 이리로 오지는 않을까. 겁에 질려서 이빨이 떨릴까 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다음 역에 전차가 멈췄을 때 나는 황급히 전차에서 내렸다. 그날 처음으로 내 맞은편의 남자보다 먼저 내린 것이다.
3호선은 길다. 그 한적한 세계는 나의 퇴근길이다. 우리 집은 종점에 있다. 바글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나면 전차 안에는 으스스한 한기가 돈다. 그 시간에는 나 혼자만 타고 있다.
맞은편의 빈자리를 보면서 가끔 그 남자를 생각한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내가 눈을 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끝>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