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꼭 가야하는 거야?
복한 가정의 저녁 식사 시간에는 조금 특별한 대화가 흐른다. 날이 선 삼각형 테이블이 낯설게 놓여있는 주방에 평범한 부모와 어쩐지 불만 가득한 표정의 아이가 있다. 아빠가 집을 나간다는 내용의 대화가 오가고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우리의 귀여운 주인공 렌이 있다.
이혼이라는 거, 이사라는 거 꼭 해야하는 거야?
어른들 세계는 왜 그렇게 복잡한 거야?
[렌의 입장]
1. 아빠의 이사
아빠는 엄마와 싸움이 잦았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줄 알았던 어느날. 아빠는 혼자 살겠다는 선언을 하고선 기어코 행동에 옮기고 만다. 아빠가 이사를 가는 날에는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 나면 날 보러 오는 거지? 내가 아빠를 언제든 보러 가도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아빠가 이사를 간 다음과 그 전이 많이 달라져야 하는 거야? 그리고 아빠, 그 이사라는 거, 꼭 해야 하는 거야?
2. 엄마의 계약서
아빠는 결국 자기만의 살림을 차려버렸다. 엄마는 말로는 개운하다면서 나를 앉혀놓고는 이상한 계약서를 밤새 썼다고 읽히기를 시전하는데… 다 아는 이야기를 다 큰 나에게 소리내서 읽으라니, 엄마의 아기 취급인지 어른 취급인지 모르겠는, 달라진 행동들이 심상치 않다. 나도 혼란스러운데 지금은 나보다 엄마가 더 힘들어 보여서 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집이 더이상 행복하지 않아 마음이 너무 복잡한 렌은 학교에서는 한번은 거짓말을 하고, 한번은 불을 질러버린다. 90년대에 들어서며 일본에서도 이혼이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사회변화가 그러한들 아이의 마음에 어떤 위안이 될 수는 없었다. 엄마의 속을 단단히 썩히며 집을 뛰쳐나가고 스스로를 가두며 참신한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유년기 때 부모님의 다툼을 생각해보면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이 다툼이 끝나 빨리 웃게 되기를, 긴장을 견디기 싫어 언니와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감정은 다른 곳으로 번져 웃음이 쿡쿡, 눈물이 찔끔 흐르기도 했다. 할 수 있다면 렌처럼 밖으로 나가 내달릴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집안에서 아빠와 엄마의 화가 누그러지길 기다리며 같이 그 갈등이 소강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말은 상상하기도 버거웠고, 좀처럼 머릿속에 그릴 수 없는 말이었다. 말로서는 존재하지만 실현될 수 없는 말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이 결혼한 나이에 가까워져 가는 지금의 나라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았을 텐데, 그때의 부모님도 우리도 서로를 생각해주기엔 아직 각자의 역할이 익숙지 않았던 것 같다. 렌과 렌의 부모에게서도 그런 모습들이 많이도 스쳐갔다.
*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이런 렌의 알 수 없이 이리저리 튀는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귀여운 모양새로 흘러간다. 다 잊은 줄 알았던 어린 기억들이 렌의 그렁그렁한 눈에 비쳐 떠오르며 공감하던 때. 적극적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려 내민 비장의 카드, 우리 비와 호수에 가자!
[우리, 비와호수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거야. ]
비와호수는 렌의 가족에게 행복했던 과거의 상징이다. 렌이 티없이 맑았던 마지막 유년기가 있던 곳이다. 아름다운 자연만 있는 그곳, 기분좋은 여행자들과 온천, 마츠리가 벌어지는 그곳에서 우리 옛날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반드시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아빠의 돌아오겠단 선언은 오히려 가족을 혼란에 빠뜨린다. 바라던 일이었는데 이를 마냥 좋아해도 될지 모르겠어서 원망스러운 마음에 최대한 멀리, 또 멀리 마을을 헤매고 다닌다. 렌을 좀처럼 따라오지 않는 엄마와 아빠, 과거를 추억하는 법에 대한 어떤 할아버지의 조언은 렌의 의식 어딘가를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마냥 축제가 벌어지는 거리를 따라 거의 하룻밤 동안 산속을 겁도 없이, 잠도 없이 여기저기 쏘다닌다.
장르가 조금 달라진 듯한 장면들이 연속되며 알 수 없는 전개가 잠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의 의도는 하룻밤으로 압축된 듯한 이 소녀의 모험에 잔뜩 담겨있다. 유년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어지러운 렌의 심리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개연성 대신 초현실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는 이 구간에서는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설프게 마주하는 두 렌이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 산속에서 잠들었다 눈을 뜨면 호수가 되는 공간. 물은 때로 생명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 물이 가득한 비와 호수가 과거-현재를 이어주는 또다른 상징적 매개로 등장하여 렌의 마지막 유년기를 장식한다.
그 하룻밤 동안 스치는 많은 사람들과 음악,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이 초현실적인 미장센을 만들어가며 결국 ’축하한다‘는 메시지로 마무리되는 렌의 신박한 이사. 90년대 일본의 조용한 마을이 보여주는 모습에 먼 향수를 느끼다 유년을 상기시키고, 막 사춘기가 시작되는 아이의 내적 갈등에 미감을 얹어 풀어낸 사랑스러운 명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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