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드펠 수사 시리즈 11-21권
정밀하고 유려하게 짜인 중세와 역사, 그 안의 인간성
역사를 배우던 학창시절, 유독 재미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책 읽듯 교과서를 들여다본 파트가 있다. 근대시대가 그러한 파트였는데, 중세시대는 그에 비해 매력이 덜한 챕터였다. 인간의 본능과 욕구에 대해 탐구하고 온갖 예술이 꽃피는 고대와 근대 사이에서, 종교의 교리가 가장 막강한 권력이자 명분이 되던 시기. 절제와 금욕, 올바름을 향한 삶이 가장 가치 있고 찬사받던 시기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역사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와 이런 시너지가 일어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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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사와 추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라는 데 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스티븐 국왕과 모드 황후 사이의 왕위 계승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12세기 중세 잉글랜드로, 정치적 음모와 전쟁의 여파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소설 속 사건들을 일으키고,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던 캐드펠은 각종 살인사건과 비극의 진실을 좇게 된다.
사건 해결을 주도하는 캐드펠 수사는 완전무결한 순백의 성직자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갈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치밀한 추리력과 과감한 행동력을 발휘하면서도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끌어안으며, 인간의 심리, 선과 악, 정의와 용서의 복잡한 본질을 탐구한다. 이러한 캐드펠 수사의 인간적 면모는 단순한 사건 해결을 넘어 죄와 용서, 정의와 자비 등 삶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캐드펠 수사가 신념과 연민 사이에서 매순간 갈등할 때마다 독자들도 그 고뇌를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인문학적 성찰까지 아우르는 역사추리소설의 원형이자 '지적 미스터리' 고전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이 같은 특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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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삶을 투영한 추리물
첫장을 펼치며 시작되는 작품의 생생한 분위기는 작가의 실제 삶과 고증이 묻어난 때문인지 단숨에 두세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주인공 캐드펠 수사에 대한 외적, 내적 묘사는 초면이라도 이 사람이 지닌 입체적인 성격에 흥미를 돋운다. 상세하게 인물을 서술한 바탕은 다름 아닌 작가의 삶에서 기인하고 있다.
작가 엘리스 피터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약국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제 2차 세계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한 이력이 있다는 점은 캐드펠의 그것과 닮아있다. 약제에 뛰어나며 군인이기도 했던 캐드펠의 풍부한 지식과 구체적인 행동묘사가 가능했던 이유이다. 작가의 고향인 슈롭셔주가 이야기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작품의 풍부함을 끌어올렸다.
섬세한 묘사의 향연
영화를 볼 때에도 영상미, 연출, 음악이라는 셋팅이 배우의 연기와 이야기를 받쳐주어야 작품성이 배가되기 마련이다. 소설에서는 그 모든 셋팅을 오로지 글로만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고독한 창작 영역이나, 이는 바꿔말하면 제한없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꾸며나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엘리스 피터스의 작법은 섬세하고 느리지만 실패없는 휘두름으로 무장되어 있다. 글을 좇다보면 눈앞에 그림을 그려주듯 인물이 어느샌가 죄와 엮여 고백을 하고, 사람과 사람 뒤에 은밀히 숨어들다 들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캐드펠은 전지적 관점을 지닌 인물처럼 관망하기도, 드러나지 않는 개입을 시도하기도 하며 이야기 전개에 긴장과 이완을 준다.
교리와 욕구 사이의 갈등
시간적 배경인 13세기 증반의 영국은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로, 교황권과 왕권의 세력 싸움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중세 시대에는 영주와 기사들의 계약, 영주와 왕의 계약이라는 봉건 사회에 기반하기에 근대로 접어들수록 나타나는 중앙집권적 왕권 체제는 아니었던 점까지 고려하면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작중에서도 황후와 왕, 주교를 둘러싼 정쟁은 계속되어 전 시리즈를 걸쳐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전반적 토대가 된다. 이 모든 것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기에 추리 뿐 아닌 역사 추리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당당하고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건네는 것이다.
그러나 미스터리라 하여 떠오르는 잔혹함, 공포감, 긴장감만이 독자들을 모으는 흡인력 있는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인물들 그 자체의 성품과 사간에 얽힌 당사자들의 관계성, 서사를 조목조목 짚으며 하나의 사건을 해결과정까지 유려하게 엮어나간다. 포기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욕망, 종교적 믿음, 사회적 시선 사이에서 갈등하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인간 군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 작품의 키워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가치에 두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이란, 그 누구의 것이라도 결코 가볍지 않으니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엄중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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