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말 2아웃
마동석의 주먹 아래, 코너에 몰린 듯한 절망적인 생활의 한 자락에서, 끈적한 8월의 햇빛에 덜 마른 빨래처럼 흠뻑 젖어, 습한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집에는 불평할 아무도 없고 티비의 메이저리그 중계가 자장가처럼 귓전에 울리고 있었다.
9th 라는 글자가 보이고, 스코어는 NYY 11 : KC 1. 아이고 머리야. 두통의 주범은 낮잠인지, 고단한 인생인지, 아니면 숨 막히는 스코어인지.......
커튼을 닫고 소파에 앉으니 트앙- 하는 경쾌한 로드리게스의 솔로홈런. 가슴 시리도록 시원하게 날아가는구나. 투수는 공을 따라 얼굴을 돌리더니 망부석이 되어버린다. 얼빠진 놈. 아마 복부에 수없는 칼을 받아내는 장동건의 심정이겠지. "마이 먹었다.."
9회초 뉴욕 공격이니, 캔자스의 9회말 공격이 남았군. "하나마나"라고 생각하다가, 흐음 리드하는 팀은 9회말 공격은 하지 않는군. 9회초에 후두려 맞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기회는 남았다는 거군. 어쨌든.......
어떤 것이든, 승리가 확실해지면 힘을 쓰지 않는다. 치타는 발이 안 보이도록 (정말 보이지 않는다) 달려 영양의 숨통을 끊어 놓고 나서야 목덜미에 앞발을 올리고 숨을 돌린다. 또 불량배도 상대가 두 손을 내리면 왠지 전의가 상실되는 법이다.(합의금도 걱정되고) 세상이 나를 이렇게 구석으로 몰아 소나기 펀치를 날리다가, 잠시 틈을 주고 희망을 주며 바라보다가, 빈 말로 동정도 하다가, 단도를 죽지 않을 곳에 찔러대며 괴롭히는 것도 아마 내게 여력이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거다. 내가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신음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동물적 본능 아니겠는가. 9회말을 남겨두고는 9회초에 얼마든지 얻어맞겠다는 유아적 패기. 어쨌든 결론은, 무언가 나를 괴롭히고 내가 팔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희망 혹은 가능성이 남았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하다 티비를 보니, 9회말 캔자스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운드에는 컨디션 조절 차 올라온 투수가 공을 사뿐사뿐 뿌리고 있었다. 캔자스 8번 폴 바코가 타선에 들어선다. 제국의 투수는 무시무시한 공을 뿌려댄다. 97마일, 99마일. 폴은 97마일 치타에 쫓기는 영양이 되어 필사적으로 배트를 돌렸으나,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뿐. 슬프다. 99마일 공이 들어오고, 이번에 들리는 소리는 부우우웅-. 마음이 아픈데 웃음이 난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헤헤 거리며 맥주를 가지러 냉장고에 가다가, 경쾌하고 시원한 소리를 들었다.
타앙-. 해설차들은 차분하게 코멘트를 시작한다. 폴 바코의 1점 홈런. 스코어는 12-2. 폴은 소년 같은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나는 폴의 타앙- 같은 경쾌한 맥주를 꿀꺽꿀꺽 삼키며 생각한다. 어쩌면......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