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저는 오늘 종교와 철학, 예술에 다리를 걸친 이야기를 해드리려 합니다. 종교인이든 일반인이든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신은 왜 수많은 악행을 막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신에게도 사정은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신이 전지한 동시에 전능할 수 없으며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 주장합니다. 그것은 전지전능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전지하다면, 전능을 발휘하여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신이 세상의 룰을 정하면, 그 아래 이뤄지는 역사는 신조차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정글과 같은 세상에도 직접 손을 뻗지는 않습니다. 게임의 룰을 정하면 게임 내용을 바꿀 수 없고, 게임 내용에 개입하면 룰을 깨뜨리게 됩니다. 다큐멘터리의 촬영팀은 사슴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글의 생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슴을 구하는 것은 사자를 죽이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나비효과, 데스티네이션 같은 많은 영화에서도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고민을 그려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프리크라임 시스템으로 범죄를 예측해 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범인을 체포합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 자체가 모순입니다. 범죄를 막기 위해 사건 전에 그를 체포하면 예언이 틀린 것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희박한 희망을 그리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신의 손짓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처에 살인과 전쟁이 일어나지만, 해결책은 사람과 사람에 대한 믿음 뿐인 듯 합니다.
'나비효과'는 북경의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폭풍우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시간을 거슬러 불행을 바로 잡지만 그 행복은 또 다른 이의 불행을 불러옵니다. 모든 사건과 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시도는, 죽어가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짧은 초를 다른 초와 바꾸지만 그 초가 자신의 초였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카오스처럼 얽혀있는 실뭉치에서 한 쪽을 풀어내면 어딘가가 엉켜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결핍인 것 같습니다. 삶은 욕망이고,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걸어가야할 길 중에 반은 험한 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비단길 같은 삶에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욕망, 결핍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 삭막한 것입니다. 무한한 시간과 완전한 만족은 모든 의미와 가치를 풍선처럼 한없이 부풀려 한없이 가볍게 만듭니다. 사랑도 꿈도 진지함도 삶도 참을 수 없게 가벼워져, 그저 농담거리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로 분한 브래트 피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다 죽거든. 늘 마지막 순간을 살지.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처럼 삶에서 유한함은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부족함에서 실망과 불행만을 보지 않고, 희소성과 행복의 씨앗을 찾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라고 아킬레우스는 말하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