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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 한바구니 Aug 25. 2023

심야의 곡성

무서운 여자 이야기


"으흐흐흐..."

"이히히히히..."


한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머릿속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졸린 나머지 잠시 잠깐 솔깃했으나 이내 다시 잠이 들려는 찰나!


"힛!... 흐으으..."

"..."

"으헤헤헤헤..."


순간 머릿발이 쭈뼛 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속을 긁는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잠이 다 사라졌다. 정신이 또렷해지며 신경은 온통 기괴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보았던 <전설의 고향> 중 '귀곡성'이 떠올랐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들로 인해 커서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와 장면들!

나도 모르게 흐느끼며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등에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슥슥... 촤악~"

"낄낄낄... 아주 좋아."


울고 싶었다. 나이만 먹었지 알고 보면 내면은 아직 어린데... 너무 무섭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방 불을 켜고 왼손에는 휴대폰, 오른손에는 근처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 집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소리는 현관문 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음 소리를 죽이며 현관을 향해 기어가듯 다가갔다.

현관문과 가까운 곳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슥슥... 슥슥..."


누군가 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옴마, 깜짝이야!"


와이프가 심야에 캘리그래피를 쓰고 있다.

조용한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작은방에서 혼자 캘리그래피를 쓰다 보니 글이 잘 써지더란다. 

글씨가 잘 써지니 기분이 좋아 혼자서 시시덕 거리기도 하고 그렇게 글씨를 쓰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남은 <전설의 고향>의 '귀곡성'을 상상하며 등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구먼!

어이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안도감과 아울러 기분이 풀어짐을 느낀다. 

긴장이 풀리자 다시 졸려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와이프는 자신이 심야에 쓴 글씨들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글귀로 이루어진 캘리그래피는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최근 글솜씨가 좋아진 덕에 강사 선생님께도 칭찬을 자주 듣는다며 좋아하는 아내. 

귀곡성 한 판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가 없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모습이 멋진 아내. 

학생들을 가르치던 경력을 포기하고 자녀를 양육하느라 오랫동안 자신의 커리어를 개발하지 못했던 사람. 20년간 남편의 성공과 자녀의 성장을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의 모습은 타인의 그림자 속으로 감춘 채 철저히 타인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사람.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캘리그래피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올 연말에 강사 선생님과 공동 작품전을 개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맹렬히 심야의 글쓰기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새벽에 오히려 눈이 또렷해지는 그녀. 하지만 중년의 체력이 어디 가겠는가. 


어느덧 눈에 핏발이 서고 눈이 침침함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만하고 자야 한다고 설득을 하자 못 이기는 척 붓을 놓는다. 

피곤한 얼굴에도 뿌듯함이 넘쳐난다.


좀 더 젊을 때 시작했더라면 지금쯤은 전문강사로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을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해도 늦지 않은 분야가 캘리그래피라고 한다. 젊어서부터 판서에는 자신이 있었다던 그녀. 배운 지 1년이 채 안 되었지만 벌써부터 강사 선생님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며 소녀 웃음을 짓는다. 


그녀의 미래를 힘껏 응원한다. 하지만 지금은 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잘 자야 잘 쓸 수 있다. 무리하지 말자. 급할 것 없다. 천천히 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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