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라는 생애 첫 감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사려고 노력한다

by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번에는 조금 무거운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 환경을 원망하려고 하는 의미에서 쓰는 내용이 아니며,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이유이다.


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첫 순간이다. 어머니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 나에게 주면서 통곡을 하고 있다.

‘누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모양이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 사고의 처음이다. 그 후로도 나는 이런 모습을 몇 번 더 보면서 어머니와 같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해가 노란색을 띠기 시작하는 오후였던 것 같다. 이 기억은 지독하게 남아서 아직도 오후가 되면 내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다.


이상하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이전에는 없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면서 집에는 거의 없었다. 그 상황을 어머니 혼자서 이겨내고 있던 것이었다.


이로 인해 어릴 때 나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자주 봤다. 나와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의 기분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나로 인해서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신경을 엄청 썼다. 그리고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나를 버리면서 내 모습이 아닌 모습을 연기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상황들이 후에 말할 내 정신 질환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다른 사람들은 알까? 선천적으로 우울 장애를 앓는 사람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고통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나도 태어났을 때는 정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처음으로 경험한 감정은 우울이었다. 이것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준건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경험한 감정이 우울이라 해도 내 성장 과정이 수월했다면, 아니, 우울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지금 내 모습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의 감정도 있다. 원망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감옥에 갔다. 사기죄로 1년 징역 선고를 받았는데 당시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 어른들은 아버지가 잠시 해외 출장을 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영업을 하던 아버지가 난데없이 해외 출장을 간다는 말이 상당히 허술한 거짓말인데 그 시절 나는 그것을 굳게 믿고 아버지가 집에 올 날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고 나서 집이 다시 화목해지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집에 걸려오는 채무 상환 독촉 전화도 많았고, 그 전화 중의 일부는 내가 직접 받은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항상 했던 말은 아버지 찾는 전화가 왔을 때 둘러대는 방법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마음을 울리는 일 중 하나이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배치고사 성적이 좋아서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었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3등까지 했었다. 시험 전 아버지는 전교 10등 안에 들면 컴퓨터를 바꿔준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다. 성적표를 들고 가니 부모님이 놀란다. 예상외로 뛰어난 성적을 받은 것과 컴퓨터를 진짜 사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진짜 놀란 듯했다. 아들이 전교 순위권에 들었다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자신이 한 약속을 어떻게 지킬까라는 걱정도 했던 것 같다. 결국엔 여름 방학에 가서야 그 약속을 지켰지만.


그렇게 중학교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 성적은 항상 좋았기에 부모님과 갈등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부모님이 좋아하니 나도 그렇게 공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행복은 3년을 가지 못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기 전, 전셋집에서 쫓겨났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어머니는 당신의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급한 대로 짐을 쌌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친할아버지 집의 작은 방 한편에 작은 살림을 차렸고 네 가족이 한 방에서 한 달을 버텼다.


그리고 한 달 뒤 아버지가 월세 아파트를 얻어 우리 가족은 다시 이사를 했다. 이제는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희망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교복 하복 바지를 수선집에서 찾아 현관 앞에 도착했는데 어머니의 울음 섞인 비난이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 직감했다.

‘우리 집은 끝났구나…’

어머니의 고함을 뒤로하고 집밖으로 다시 나갔다. 집에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파트 놀이터에서 서성이다 몇 시간 뒤에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집이 전혀 편하지 않았다. 그냥 집 안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나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집은 나에게 전혀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밤 9시에 학교에서 나가도 집에 가기가 싫었다. 집에 가면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 어머니의 슬픈 눈을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 해 가을에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이삿짐센터를 불러 급한 짐만 챙길 때까지 우리를 보러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급하게 큰 이모에게 부탁하여 우리가 지낼 방 하나를 마련했다. 큰 이모 집에 남는 작은 방. 이 방에서 나는 10년을 보냈다. 침대 하나 들어가면 절반이 차는 방에 어머니와 함께 10년을 버텼다. 어머니는 가정 주부였지만, 이후에 고기 집에서 서빙 일을 하면서 나를 키웠다. 주 1회 휴일, 나머지는 11시까지 설거지와 서빙을 하는 일.


이 시기는 내가 가진 어두운 면의 시작이었다. 우선 큰 이모는 외할머니와 같이 지내고 계셨다. 나와 동갑인 외사촌이 내 고향의 과학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외삼촌은 외사촌 누나의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외할머니, 큰 이모, 외사촌, 어머니, 나 이렇게 5명이 그 좁은 집에서 같이 지냈다. 정말 숨이 막히는 그런 환경이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 감정의 기억 밖에 없다. 정말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사춘기를 겪을 틈새도 없이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당장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들어가 나중에 좋은 직업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어머니만 봐도 저렇게 고생하면서 나를 키우는데 내가 여기서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생각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부모님을 졸라 옷을 사고, 좋은 학원에 가고, 주말에는 외식을 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부러웠다. 일단 온 가족이 온전하게 있다는 부러움이 제일 컸고, 그렇게 어리광을 부릴 여유가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리고 TV를 보고 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부러웠다. 당시 집에는 TV가 안방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TV를 보지 못했다. 큰 이모 댁에 들어간 이후로 나는 TV를 보지 못했다. 컴퓨터도 잘하지 못했다. 컴퓨터는 외사촌이 쓰는 공부방에 있었는데, 그 아이가 말없이 들어와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면 나는 컴퓨터 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어머니와 쓰는 방에 들어가 밥상을 펴고 공부를 했다. 그 현실이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어릴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데 상당한 주저감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하고 싶은 것을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건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온 가족이 멀쩡히 있고,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하는 것. 그리고 내 방이 있어 내 방에서 나만의 생활을 가지는 것.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대학생이 되었다. 고3 1학기, 서울권의 대학에 수시 모집을 지원하려고 어머니하고 얘기하는데, 어머니가 서울은 우리 집 형편에 보내주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등록금의 무게와 우리 집의 가난한 정도를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나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깰 수 없는 한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 컸다. 오죽하면 항공대에서 운영하는 비행기 정비 수업을 듣고 공군에 바로 지원할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가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고 해서 고향의 국립대에 들어갔다. 운이 좋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어머니와 방을 같이 쓰는 생활은 이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조금만 있으면 나도 사회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군대를 갔다 오고 복학을 한 뒤에 졸업은 겨우 할 수 있었다. 운이 이번에도 좋았는데,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좋은 회사를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나도 이제 행복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시기였다. 취업을 하고 나서 결혼을 생각하며 진지하게 만나던 친구가 있었다. 2년 가까운 시간을 만났다. 내가 그 친구를 정말 좋아했었고 결혼 얘기도 몇 번 했었다. 그런데 내 진지한 마음에 돌아온 답변은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다.

‘너희 아버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거야? 지금 남처럼 지낸다 하더라도 나중에 돈 달라고 와서 힘들어지면 어떡해?

‘너희 어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돈도 없는데 집을 따로 해서 모시는 건 어렵지 않아?’

‘우리 엄마가 너하고는 연애만 하래’

위의 말들로 시작해서 점점 꼬리가 길어지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누구에게 상처 주는 게 싫어서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못하더라도 상대의 기분을 존중하면서 살았는데 왜 너는 나에게 이렇게 쉽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내가 뭘 잘못했길래 세상은 나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는가?


그렇게 그 친구와는 이별을 했다. 결혼 생각은 그렇게 없다던 그 친구는 얼마 가지 않아 다른 사람과 결혼까지 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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