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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Jul 24. 2024

장엄하다는 건

 장엄하다. 일상적이지 않은 표현이네.

 숨을 붙이고, 음식을 삼켜내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은 눈을 감고서, 그렇게 살아내는 동안 마주하는 것들 중 장엄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좋다, 멋있다에서 출발해 장엄하다에 도달하기까지는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할까. 그런 생각의 끝에도 장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얼마나 될까. 장엄한 걸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나 있으며, 그걸 마주하기 위해선 무슨 노력을 해야 하지. 단순히 좋은 감각보다는 감동에 가까운 순간 숨을 턱 막히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그런 거.




8시가 넘어서야 밤새 숨어들었던 색들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실내는 적당히 따듯한데 밖은 많이 추운가 보다. 창에 물방울이 가득 맺혀있다. 어제의 빛나던 태양과 푸른 하늘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아쉽지 않다. 쾌청한 날을 좋아하는 내가 비 오길 바라게 하는 건 그럴 때만 마주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거겠지.


 사과를 먹으며 아침을 준비한다. 치아바타를 반으로 갈라 구워낸다. 빛깔 좋던 등심베이컨도 굽고, 계란도 스크럼블해 담아둔다. 치아바타부터 한입 베어문다. 겉면이 질깃하다, 내가 좋아하는 식감. 하얀 속을 뜯어먹어보면 쫀득하게 치아가 들어가는 느낌이 참 마음에 든다. 빵만 먹어도 맛있어서 다른 토핑을 더하기가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 올리브오일을 충분히 뿌려내고서 또 한입 베어문다. 이 올리브오일 참 마음에 든다. 과실향이 강조되고 잡스러운 기름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콤한 느낌도 옅게나마 느껴지는 게 빵과 잘 어울린다. 다음 조각을 집어 들고서 베이컨만 올려 한입 베어 물어본다. 한국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돼지 등심으로 만든 베이컨이라 구매해 보았다. 살코기에도 마블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눈길을 끌어서 사보았는데 과연 이었다. 비주얼만큼 맛있었다. 가브리살도 붙어있었고 지방도 작게 남겨두어 풍미가 좋았다. 나는 돼지 지방 중 등지방이 가장 맛있다고 느낀다. 인공적인 훈연향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점도 좋았다. 다음 조각엔 베이컨과 스크럼블까지 같이 올려낸다. 완숙까지 익혀내지 않은 스크럼블이 베이컨과 잘 어울린다. 아침부터 맛있다며 행복하다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그 시간이 썩 즐거웠다.


 오전엔 마나포우리로 향했다. 누나가 운전대를 잡는다. 나는 조수석에 자리를 잡는다. 본인이 했던 우려와 달리 곧잘 운전하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누나와 시간을 보내며 고맙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자주 듣고 자주 말한다. 누군가에게 고마워할 수 있다는 게, 누군가가 내게 고마워한다는 게 큰 행복을 안겨주는 일이구나를 요새 깨닫곤 한다. 30분이 채 안되게 달려 호숫가에 차를 멈추고 산책을 했다. 6인용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캠핑카가 다가오기에 손을 흔드니 운전자가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상대의 얼굴을 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짧게 마주치고 지나는 이에게 손 흔들고 인사하고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건, 그게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라는 게 멋있고 부러웠다. 이곳에 여행하며 마주하는 즐거움이다. 다만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고 살 수 있는가 물으면 답하지 못하는 내게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주택가를 산책하다 작은 상점을 마주했다. 다만 종업원은 없고 판매하는 물품은 단 두 가지. 재고는 많이 준비해두지 않는다. 계산은 구매를 원하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하고 현금만 받는다. 아, CCTV는 설치되어있지 않다.


 점심으로는 알리오올리오를 해 먹었다. 우리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 식사를 준비하고 먹는 데에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편인데 근래 들어하고 싶은 게 많아지며 하루에 한 끼만 공들여해 먹고 나머지는 요리하는 시간을 줄여보자고 마음먹었다. 12시 45분에 숙소에 도착하고서 1시 30분에는 식사를 끝내자며 약속했다. 얼른 식재료를 챙겨 들고 공용주방으로 향한다. 보통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는 기다란 면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색다르게 만들어보고 싶어 푸실리와 스파게티를 둘 다 챙겨 들고 왔다. 누나에게 푸실리로 만들어보는 거 어때하고 물으니 흔쾌히 오케이 해준다. 우린 이걸 요리실험실이라고 부른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함께 즐겨주는 누나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푸실리를 알단테로 삶아내고 올리브오일에 다진 마늘을 볶다 면수와 면을 넣고 불을 끄고 섞어내며 소스를 끈적하게 만들고 그릇에 담아낸다. 그대로 먹어보고서 올리브오일을 더 뿌려낸다. 이 올리브오일 참 마음에 든다. 채 24시간이 안되어 벌써 반 병을 비워냈다. 충분히 맛있는 파스타를 색다르게 먹어보고 싶어서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조금 섞어본다. 요리실험실. 맛있지만 홀그레인의 맛이 강해 마늘과 올리브오일의 풍미를 많이 약하게 만들기에 여기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끝내고 시계를 보고서 놀란다. 정확하게 1시 30분이었다. 무던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에 크게 놀라보는 거, 꽤 마음에 든다.


 오후엔 밀포드 사운드로 향한다. 남들 다하는 건 하기 싫은 모난 성미가 참 좋다. 어제 숙소에서 만난 필리핀 친구도 간다고 하던 밀포드 사운드 페리투어는 가지 않기로 한 내가, 그런 내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 그녀가 좋다.

 차에 오르고 달리고 감탄하고 차에서 내리고 감탄하고 차에 타길 반복했다. 대여섯 번은 넘었으려나.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던 그 풍경들은 감히 장엄하다고 뿐이 표현할 방도가 내게는 없다. 특히나 깊은 협곡에 들어서고 나서 온 사방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던 돌로 된 산들. 그 속에서 그 감정을 무어라 표현한다는 것이 경솔한 것만 같이 느껴지는 그 순간에 많은 생각이 나를 스쳤다. 그곳에서 차가 고장 난 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지. 지나가는 차를 우연히 마주하는 걸 기다리며 그 차에 탄 사람들이 나를 돕기를 기대하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지 않을까. 그런 차들 조차 없다면 추워서 혹은 배곯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는 내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걸 생각했다. 겸손이 무엇인지에 대해 왜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몸으로 나의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2일 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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