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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게 제일 좋아!!!

by 온혈동물

고등학교 때 시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나는 책 속으로 숨곤 했다. 집에 있는 주말이면 집에 있는 모든 종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남들은 시간 날 때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시점에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내가 고민이 생기면 그 고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공부만 해도 모자라는 시간에 책만 읽고 있는 나를 보던 엄마는 집에 있는 책들을 숨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시험 보러 춘천으로 가기 전날 일요일에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종일 티비 앞에서 하루 종일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다. 보다 못한 엄마가 내 등짝을 때리고 쫓아낼때까지 말이다.


최근 몇 주동안 나는 세편의 넷플렉스 드라마를 끝냈다. 이틀 전에 시작한 '악연'이라는 한국 드라마를 이틀 만에 끝내버렸다.


드라마 속으로 숨고 있는 나의 현재 고민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에 유난히 수술이 많아 고민이 많아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열심히 한동안 살다 보면 가끔 '삑'하고 나사가 풀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뛰쳐나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곤 했다. 어쩌다 다들 바빠 아무도 만날 수 없으면 혼자서 집 앞 있는 술집에서 혼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럴만한 상황이 잘 되질 않는다.


아무래도 몰아서 놀아야 할 때가 온 듯싶다.


오늘 새로운 지점의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파트타임으로 일주일에 하루 일하는 병원인데, 최근에 집 근처에 있는 병원에 매니저랑 트러블이 생겨 다른 지점으로 지원해서 한 달을 쉬고 첫 출근을 했다. 이 병원은 특징은 수술과 진료가 같이 있어서 점심을 챙겨 먹거나 하루 종일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일단 병원에 들어가면 하루 일과가 끝날 때까지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병원일과가 끝나면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딘가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멍한 느낌이 든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몇 월 며칠인지도 가물가물해진다.


점심도 일을 하면 대충 때우고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저녁에 술한자 하고 나니 이제 정말 지겹게 놀 수 있는 시간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노는 게 너무 좋았다. 어렸을 때는 밥 먹을 때 빼고는 하루 종일 나가 놀았다.

대학 때는 이틀에 한 번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나이 들면 해야 할 일과 책임이 많아지니 그렇게 할 수도 없도 이제 그런 게 재미없어졌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가끔은 일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나인가 보다.


술을 마시다 남편한테 "나 내년에 비행기값쌀 때 한국에 한 이주정도 가서 놀아야겠어. 우리 집이나 너희 집 다 연락 안 하고 놀다 올래" 했더니, 남편은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정말 내년에는 아무도 모르게 한 이주 놀다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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