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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Dec 21. 2022

남편이 한국에 갔다.

아이들이 짧지만 방학이라고 신나 하는 사이, 한국의 시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원래 지병이 있으시던 시아버지가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셔서 아들이라도 더 늦기 전에 와보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부랴부랴 LA 직항 비행기표를 알아보는데,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 연휴에 연말이라 다들 여행을 가는 것인지, 좌석도 한자리나 두 자리 남아있다고 되어있었다. 물론 빨리 가는 게 좋지만, 하루 이틀을 다투는 상황은 아니라 하와이안 경유행 비행기표를 직항 2/3 가격에 끊고 남편은 여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시아버지의 병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미국으로 온 직후부터 발현이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기 시작하시더니 조금씩 끌기까지 하신 것이다. 아버님은 원래 하시던 일이 한방약물 취급을 하던 회사에서 오래 일하셔서 나름 본인의 의학상식도 자신 있어하시던 분이라 큰 병원만 고집하시며 서울대 연세대 병원을 다 돌고 한방병원까지 곳곳에서 진료를 받으셨다. 처음엔 병원마다 각각 하는 얘기가 달랐다. 어디는 디스크라 하고, 어디는 MRI에 사진에 조그만 병변이 보인다 하고, 어느 누구도 딱히 병명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오른손도 느려지시고, 오른 다리는 눈에 띄게 근육위축도 시작되었다. 그러다 한 병원에서 '파킨슨 양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년 전 우리가 사는 곳에 아이들 여름 방학을 맞아 오신 아버님은 눈에 띄게 다리를 쓰지 못하셨고, 밖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지 않으면 걷기도 힘들어하셨다. 그러면서 들고 오신 약봉지는 한 뭉치였고, 온갖 신경안정제 간질약이 포함된 약을 매일 한아름씩 드셨다. 팔과 다리의 둔화 외에는 어떤 통증이 있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없었음에도 온갖 정신과 약과 신경치료 약을 드시고 계신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약으로 인해 하루 종일 졸려하시고, 깨어계실 때는 본인이 얼마나 치료를 잘 받고 계시고, 본인의 과거 얘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으셨다. 


내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파킨슨 양 증후군이라는 진단이 나왔어도, 원래 파킨슨병보다 더 흔치 않은 병이고, 소뇌가 서서히 위축되어 가는 원인도 알 수 없는 치료도 딱히 없는 병이라, 부모님 입장에서는 답답하신 듯했고, 병원에서도 아마도 계속 치료가 없냐 의사를 쪼아댔을게 분명. 그래서 하루에 대여섯 개가 넘는 알약을 하루 세 번씩 처방받으신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치료할 수 없는 병인데, 파킨슨 약과 다른 정신과 약을 처방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도 아니고, 약을 드시면서 부모님은 나름 뭔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올여름에 우리가 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아버님은 휠체어에서 일어나지 못하셨고 낮에는 데이케어 주 6일 나가고 계셨다. 어머니는 말씀으로는 아버님이 평생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셨으니 최선을 다해 돌보겠다 하셨지만, 아버님에 집에 계시는 날은 잠깐 밖에 나가 친구들을 보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듯했다. 문제는 밤에 아버님이 화장실을 가시겠다 하면, 어머님도 같이 일어나 부축해서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그러다 아버님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시면 부축하시거나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이 때문에 계속 허리를 아파하시고, 밤에 계속 자다 깨다 하시는 날들이 많았다. 아버님은 평소에 자신감이 강하시고 가족을 무척이나 위하시던 분이셨는데, 병 때문인지 점점 본인 위주가 되어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번 가을에 아버님이 코로나에 걸려 오셨고, 어머님도 간병하시다 발병하여 몸살에 본인이 너무 지치는데, 도저히 아버님의 화장실 케어나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잠시만 요양원을 보내자 했던 것이 아버님의 병세 악화에 불을 붙인 것이다. 요양원에서는 대소변을 모두 기저귀에 보게 강요했고, 꼼짝도 못 하고 누워만 계셔야 하니 점점 식사도 잘 못하시고 두 달 사이에 체중이 20킬로나 줄면서 섬망 증세와 의식 저하가 온 것이다. 


이후 병원 치료 후 약간 호전되어 집에 모시고 왔는데, 갑자기 연하곤란과 의식저하가 생기면서 음식물이 폐로 넘어가 오현성 폐렴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어머님이 남편에게 전화를 하신 것이다. 


남편의 아버님은 가족에게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늘 소파와 한 몸이 되어서 티브이를 보시는 게 일과였고, 운동은 항상 말로만 하시는 분이었다. 처음에 몸이 불편해지면서 재활치료를 받으시곤 하셨지만, 운동은 본인이 아니라 남이 잘 시켜줘야 하는 걸로 인식하시는 것 같았다. 반면, 나의 아버지는 평생 본인만을 위해 사신 이기적인 분이시지만, 말 대신 항상 행동하시는 분이다. 하루에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시간은 걸어야 하고, 60대에 서핑에 도전하시는 분이다. 두 분이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이라 가끔은 신기하시도 하다. 자식 입장에서는 시아버지가 훨씬 좋으신 분이지만, 노년의 삶을 보면 본인한테 좋은 건가는 잘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는 '혼자 잘 살 수 있다'는 모터를 갖고, 혼자 식사도 잘해 드시고, 운동하러 다니시며 본인 스스로 돌볼 수 있는 만큼 살겠다는 식이고, 시아버지는 누군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운동을 해 드려야 되는 분이라 항상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 집에 오셨을 때, 플랭크 자세 한번 하시는 데도, 어머니께 계속 이렇게 저렇게 옆에서 보조하라 닦달을 하셨다. 


모든 일은 항상 양면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나 늙어간다. 매 순간이 늙어가는 순간이다. 어떻게 늙어갈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좀 외롭더라도 나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순간까지 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몸에 좋은 것만 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운동하고 체중을 유지하고자 한다. 종종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살려고 운동한다'라고. 늙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몸을 유지하는 건 운동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니, 가능한 것에 몰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편은 연말 비행 차질로 하루를 하와이에서 지내고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다행히 아버님은 발열이 조금 내려간 듯하다. 의식이 좀 돌아온 듯하시지만,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을 하신다고 한다. 이미 병의 진행이 많이 되었고, 요양원 이후로 온몸이 완전히 굳어서 거의 누워계셔야 하고, 병의 말기라고 생각되는 연하곤란까지 온 상황이라, 누구도 아버님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시어머님은 전화할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리신다. 여름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시어머님은 올해 77세인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80까지도 못 사는 거라 너무 일찍 가시는 거라며 안타까워하셨다. 내가 안타까운 건, 평생 일하신 아버님이 말년에나마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지 못하시는 것이다.  몇 살까지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아마도 그게 우리 부모님 세대와 우리 세대의 차이인 것 같다. 부모님 세대는 양이 중요하고, 우리 세대는 질이 중요하다. 


내가 미국에 와서 진료를 하며 한국과 가장 다르다고 느꼈던 점이 안락사에 대한 태도였다. 한국에서는 웬만해서 안락사는 절대 권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는 어떻든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반려동물이 통증이 있거나 말기 상태의 질병 상태라면, 안락사를 권하지 않으면 오히려 원망을 듣는다. 얼마 전, 17살 고양이가 만성 신부전으로 근근이 연명치료를 하던 중 보호자가 내게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는 보내주는 것이 고양이를 위한 일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더니, 그 보호자는 나에게 고맙다며, 그 말이 필요했다고 한 일이 있다. 참 다르다고 느낀다. 물론 사람과 동물은 엄연히 다르지만, 같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보내줄 때 보내줄 수 있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시아버지는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셨고, 능력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내셨으니 좋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남은 기간 힘들지 않으시고 편안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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