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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Nov 23. 2023

쓸 수도 있는 돈과 정의할 수 없는
인간관계

아침부터 엔진오일 체인지를 예약한 남편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난달에 한 달간 정비소에 들어갔다 온 남편의 차는 'chargin system error'가 들어와 배터리도 새로 갈아 끼워 보았지만 변함이 없어 그것도 확인할 겸 남편의 브레이크에 대한 우려까지 점검할 계획이었다. 남편이 내게 "블레이크를 밟으면 소리가 간간이 나는데, 이걸 갈아야 되냐고 물어봐야 할까?"라고 물었고, 나의 대답은 "그렇게 물으면 당연히 갈라고 하겠지"였다. 항상 집이든 차든 무언가를 계속 돈을 들여해야 한다고 하는 남편에 항상 브레이크를 거는 건 나다. 왜 항상 그렇게 돈을 들여해야 할 것을 찾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생각하며 잠시 짜증이 나 있었다. 

그러다 최근 읽은 자기 계발서에서 '부족한 것에 대해 집중하지 말고, 풍요로움에 집중해야'라는 말이 생각나 생각을 바꿔 먹었다. 남편이 원하는 것들에 대해 돈이 얼마나 들까 짜증을 내는 대신, 나는 그걸 지불할 충분한 돈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많은 책들에서 미국 사람들의 대부분의 계좌에 2백만 원의 잔고가 없다고들 말하는 걸 보면서 '설마'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가끔 사람들이 신용카드 5,6개를 들고 200불(한화 26만원 정도)을 한도초과 때문에 나눠서 계산하는 것을 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국에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가 가장 걱정했던 두 가지는 '총기사고와 의료보험'이었다.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터무니가 없을 정도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보험이 전혀 없는 상태라 여러 개의 민영보험사들이 있고, 그걸 처리해야 하는 병원들은 엄청난 의료비를 청구한다. 그에 대한 괴담 아닌 괴담들이 만연하고-예를 들면, 한 의과대학 레지던트가 스키를 타다 사고가 나서 헬기가 와서 병원으로 후송을 하는데, 이미 병원 시스템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진정제를 맞아 정신이 오락가락 한 와중에서도 그 헬기가 자신의 보험으로 커버되는지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고, 결구 천만 원에 가까운 자기 부담금을 내야 했다던가, 수술을 하고 났더니 수술에 온 마취가 의사가 다른 병원에서 지원 나온 사람이라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몇천만 원을 내야 했다던가 하는- 등등의 얘기들이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민영화의 천국인 미국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보험이 지원되는 병원에서 모든 병원비를 퇴원할 때 지불해도, 몇 달 후에 몇천 불의 추가 지불액이 우편으로 날아오는 일은 허다한 일이니 말이다. 

그런 일들로 인한 의료비로 인한 파산이 개인파산의 탑 3 안에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기에 나는 항상 불안한 마음이 들이도 했었다. 그런데 중산층 미국인들의 개인 저축액을 보면, 그 액수가 엄청나서이기보다는 아마도 자신의 여유자금이 없기 때문일 듯하다. 


차 수리점에서는 세 시간이 지나 전화가 와서 문제에 대한 예상 청구액을 보내왔고 오늘 처리하는 게 어떠냐고 닦달을 해왔다. 금액을 확인해 보았더니 브레이크를 갈고 다른 추가적인 것까지 붙여서 천불(한화 13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약간은 불친절하게 안 하면 안 될 것 같이 말하는 수리사에게 부품값과 인건비가 뭉뚱그려져 있어 각각 뭐가 얼마인지 따져 물었더니, 그럼 그냥 엔진오일만 갈고 다음에 오라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구 130불을 지불하고 차를 찾아오면서 든 생각은, 천불정도는 지불할 수 있는 우리의 상황에 감사했고, 그렇지만 브레이크보다 차의 바퀴가 너무 닳아 그걸 교체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몇백 불 혹은 일 이천 불을 지불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금액들이 쌓이면 더 중요하게 써야 할 만불은 나에게 없다. 

전에 읽은 스노폭스 회장인 김승호 님의 책에서 본인이 뉴욕의 식당 앞에서 한 노숙자에 주머니에 있던 지폐와 동전을 주었더니, 그 노숙자는 페니와 같은 작은 동전들을 골라 버리고 가, 자신인 그 페니를 다시 주어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돈을 모으고 쓸 수 있는 여유자금을 만드는 것은 돈을 당장 쓰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 나는 오늘 그 풍요로움과 쓸 수도 있는 여유를 갖게 된 듯하다. 



인간관계는 때론 사람을 충만하게도 혹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작년에 한국의 한 친구를 아는 동물병원에 소개해 주었다. 약품회사에 오래 다니던 그 친구는 최근 몇 년 회사에서 나온 후 동물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못 버티고 집에서 몇 년째 쉬고 있었기에, 그 친구의 새로운 일터복귀가 나름 보람스런 소식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장문의 카톡 문자로 병원의 나이 든 실장님과 트러블이 생겨 크게 싸우고 병원을 그만둘까 하는 소식을 들었다. 직장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피할 수 없기에 문제가 생기면 아주 힘든 일이 된다. 문제는 그 친구의 얘기는 그 실장님이 아주 비인간적이고 자신을 왕따 시키기까지 했다는 얘기였다. 


나는 최근에 나를 'bad ass dr'이라고 추켜세우던 테크니션이 병원에서 해고를 당하면서 나에 대해 안 좋은 메일을 상사들에게 보냈다는 들었다. 그 테크니션의 평판이 워낙 안 좋고 인턴에 대한 성희롱 사건까지 결부대어 해고된 터라, 누구도 그 친구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에 문제는 없었지만, 굳이 좋은 기분이 들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친구에 대해 어떠한 배신감도 들지 않았다. 왜일까?

아마도 나 역시 그 친구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갖고 있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가 나를 칭찬할 때도 굳이 나쁘지 않았지만, 크게 기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 친구의 수선스런 나에 대한 찬사는 내 상사가 나에게 좋은 연봉인상을 제안하는 바탕이 되었기에 그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있다. 파트타임으로 있던 곳이었기에, 그 좋은 제안은 풀타임에서의 월급인상으로 이어졌고 나는 회사를 옮기지 않았다. 처음 연봉 제안을 해준 상사에게 너무 미안했는데, 다행히도(?) 그는 내가 다니는 회사의 하와이 지부로 옮기면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내가 나에게 잘해주 상사 때문에 파트타임을 풀타임으로 바꾸었다면 오히려 내가 황당한 상황이 되었을 수 있다. 

그 상사는 나의 월급인상을 그의 상사에게 허락받는 과정에서 이미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고, 사실 나에게 미안했지만 가기 전에 나한테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 

여기서의 결론은,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결국 공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생기는 감정들-물론 인간이기에 호불호가 생기고, 더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으로 나뉠 수밖에 없지 마-은 기본적으로는 일을 바탕으로 생긴 것이기에, 지나친 감정을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친구에게 나도 장문의 카톡을 보내고, 그 친구가 내 얘기를 이해해 주길 바라지만 큰 희망은 갖지 않는다. 왜냐면, 그 친구는 이미 그 인간관계에 너무 큰 감정적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라고 느끼거나 가난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내가 사랑받는다 느끼거나 미움을 받는다 느끼거나, 어쩌면 다 나의 허상일 수 있다. 객관적인 현실은 그것과 완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 감정을 조절하고, 상황을 조절하는 것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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