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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Apr 12. 2022

맬서스의 망령을 소환하려는 자들

맬서스의 인구론은 교만한 학자가 오류투성이인 경제 학문을 내놓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론이다. 어떤 이론이 이렇게까지 악의적인 평가를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인구론의 경우는 이론이 윤리 도덕적인 문제와 결부가 되면서 악명이 높아졌다. 실제로 맬서스는 가난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굶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인류의 재앙을 막는 일이라고 말해 당대 시행하려고 했던 빈민구제법 발목을 잡았고 이로 인해 맬서스는 죽을 때까지 악담을 들어야만 했다. 


맬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이를 방치할 경우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위생악화, 질병, 전쟁등과 같은 전개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구 과잉의 문제가 임계점을 뛰어 넘지 않도록 저소득층의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만든 세상의 섭리고, 인류가 살 길이라고 하면서 인구 제한에 차별적 요소를 적용, 부도덕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런데 맬서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성직자 신분으로 굶주리는 사람들 외면하자는 등골이 오싹한 반인도주의적 주장까지 했던 그가 틀렸던 것이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지도 않았고 현재는 오히려 인구절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인구감소가 문제가 우려되고 있을 정도다. 식량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 비료 등의 발전으로 생산 기술이 증대하면서 인류는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맬서스의 이론은 ‘세기의 독설’ ‘사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맬서스를 신봉하는 맬서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저소득층과 제3세계 국가 등에 대한 차별적 태도로 그들이 아이들을 생각도 없이 많이 낳고 게으르기 때문에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공격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사회 빈부 격차에 따르는 불평등을 합리화하고 빈곤은 사회구조 때문이 아닌 빈곤층의 무능 탓으로 국한시켜 사회와 지도층을 면책해주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는 다시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를 돕는 일이라는 궤변적 논리로 이어졌다. 이러한 맬서스의 망명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인 만행도 합리화시키는 요술방망이로 쓰이기까지 했다. 이는 하나의 이론이 특정 엘리트 혹은 부유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왔을 때 어떻게 악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르완다 대학살도 예외는 아니었다. 르완다 대학살은 1994년 르완다 대통령 하브지리마나가 탑승하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된 다음날 시작됐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100일 동안 약 100만 명이 살해됐고 이것은 하루에 만 명, 1시간당 400명, 1분당 7명이 살해당한 수치다. 1950년대 이후로 전세계에 벌어진 대학살 중 인구대비 두 번째 규모다. 집단 학살은 르완다 내부의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종족 싸움으로 여겨왔지만 사실은 정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자행된 비극이었다. UN의 평화유지군과 미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는 이를 외면하거나 심지어 이에 동조 또는 지원하기까지 했다. 대학살이 토지 재분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인구 과잉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리화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까지 국민 각자가 토지를 적당량 제공받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르완다인들이 있다. 인구 과잉을 비롯한 기후 변화와 정치적인 문제들이 병합되면서 사회 붕괴가 일어나면서 전쟁 혹은 대학살과 같은 재앙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고 오히려 이 과정이 한 차례 지나가야 인구 감소로 인해 사회가 안정될 수 있고 기술 발달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이 인구론을 읽고 진화가 적자생존 즉 끝까지 살아남는 종은 강한 종도 아닌, 적응을 잘 하는 종이며 적응하지 못하는 종은 자연도태 된다는 기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다.


르완다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학살을 저지르면서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더 큰 재앙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보호하는 일이라는 파시즘적 논리를 퍼트렸다.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르완다인들은 “국가가 할 일을 했네.”라며 순응해버리고 만다. 그러니 부정부패와 인권 탄압을 일삼는 독재자 혹은 기득권 세력에게는 맬서스의 경고는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빈민 구제나 사회 복지는 오히려 더 큰 사회악이 되어 돌아온다니 온갖 나쁜 짓을 하다고도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게 만드는 묘법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독재정권, 부정부패한 권력들이 나오면 이미 사장되어 흔적조차 사라진 것 같았던 맬서스의 망령이 부활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작동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종교계에서 사람들의 믿음을 증폭시킬 때 두려움을 건드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맬서스주의자들이 쓴 ‘성장의 한계’라는 책의 서문에는 “연못에 수련이 자라고 있다. 수련이 하루에 두 배로 늘어나는데 29일째 되는 날 연못의 반이 수련으로 덮였다. 아직 반이 남았다고 태연할 것인가? 연못이 수련으로 뒤덮이는 날은 바로 그 다음날이다.”이라며 인구 증가에 대해 충격적인 경고를 던져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불의한 지배세력의 파국적 예언이 동요돼서는 안 된다. 현 사회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는 권력과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자들에 대해 저항하고 그들을 저지시켜야 한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선한 사람들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그것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면 된다. 다시 말해 악한 사람들이 힘을 쓸 수 없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맬서스의 망령이 특정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고 합리화하는데 결부되지 않도록 말이다. 


*생각해볼 문제   

인구증가는 대량학살로 이어지는가?


맬서스의 이론의 오류는 어디에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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