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간단한 수술을 하고 거동이 불편하여 며칠 동안 평소 안 하던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빨래도 하며, 생색이 그다지 나지 않는 가사 노동의 고단함을 새삼 느꼈다. 그 고단함의 또 다른 원인은 그 노동의 가치에 대한 박한 평가와 보상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는 일을 잘하면 승진도 시켜주고 칭찬도 받을 수 있지만 이 지난한 가사노동과 육아는 그런 게 없다. 심지어 이런 중노동을 “집에서 논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아이들 밥도 해 먹이고 세탁기에 일반 의류와 수건 (흔히 타월이라고 하는) 들을 넣어 돌린 후에 다시 건조기에 넣고 빨래를 끝냈다. 수건은 건조기에서 따로 돌리라는 아내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나를 기특해하며 뽀송뽀송하게 건조된 수건을 개기 시작했다. 갓 구워 낸 빵처럼 따듯한 수건들을 앉아서 각 잡아 개고 있다 보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수건의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 직장에서의 체육대회 날짜, 이미 폐업한 친구 가게의 개업 기념일, 부모님의 교회 행사, 친지들의 회갑 등 여러 기념일들이 수건 밑단에 새겨져 있었다.
‘어? 내가 그 회사 다닌 지가 벌써 이리되었나?’
‘이 가게 이름은 뭐지?’
보다 보니 재밌어져 이미 갠 수건들을 다시 펼쳐 들여다보니 지나가 버린 내 삶의 크고 작은 행사들이 수건들에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첫 애의 돌잔치 때 나눠 주었던 수건도 있었다. 하객들에게 나눠 주고도 수건이 많이 남아 한참을 더 썼었는데 이 수건도 그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참석하지 않는 모임들에서 준 수건도 있고 도대체 나랑은 연관이 없을 법한 단체에서 준 수건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제는 매각되어 없어져 버린 전 직장에서 받은 수건에 눈이 갔다. 그 회사로 이직하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접고 충북 오창으로 이사를 했었다. 낯선 곳에서의 새 출발이 어색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새롭게 지어지는 공장을 매일매일 지켜보면서 마치 내가 공장의 주인 같은 기분이 들던 그런 시절이었다. 또 지금은 더 심해졌지만 그때도 역시 서울에서 살만한 집 하나를 장만하는 것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오창서 마주한 큼지막하고 탁 트인 전망 좋은 아파트에 아내와 나는 대단히 만족해했었다. 첫 애도 그곳에서 낳았다. 베란다에서 커다란 유모차가 회전이 되는 걸 보고 서울서 이런 아파트를 우리가 어떻게 구하겠냐며 좋아라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몇 번의 이직을 하며 그다지 특별할 거 없는 나의 직장생활 중에서 가장 활기차고 희망에 차 있던 시절이었다. 아쉽게도 그 공장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가동도 못해보고 완공되자마자 매각되고 말았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지방생활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루 가득 수건을 펼쳐 놓고 있는 나를 본 딸이 묻는다.
“아빠, 수건 갤 줄 몰라서 그래?”
“아니 그냥 수건을 좀 보고 있어”
“수건을 왜 봐?”
“너 고향이 오창인 거 알아?”
딸은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뚱하게 묻는다.
“오창? 오창이 어디야? 나 서울 아냐?”
“넌 아빠가 오창에서 일할 때 거기서 낳았어”
“그래?”
그러면서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널브러진 수건들을 다시 개다 보니 뜻하지 않게 꺼내진 예전 기억들도 다시 차곡차곡 수건으로 다시 접혀 들어가는 느낌이다. 다 갠 수건들을 욕조 수납장에 넣는데 다시 나온 딸이 한마디 한다.
“엄마는 이쁘게 갰는데 아빠는 삐뚤빼뚤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