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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May 11. 2024

인생, 한 방이지

일상의 글쓰기 - 글감[빚]

“아유, 저 진짜 눈 안 높다니까요. 키는 저보다 작지만 않으면 되고요. 처음 만났을 때 대머리만 아니면 좋겠어요. 직업이요? 상관없어요. 빚만 없으면 돼요. 진짜로요. 술, 담배는 안 하는 남자가 더 좋긴 한데 말만 잘 통하면 만날 수 있어요.”  


진미가 소개팅남에게 또 거절당한 참이다. 아니, 이렇게 마음씨 곱고 주변 사람 배려하고 자기 일도 깔끔하게 잘하는 데다 순수하기까지 한 여자를 못 알아보다니, 남자들은 다 안과에 가 봐야 한다. 하나같이 눈에 확 들어오는 예쁜 여자만 찾으니 이런 진국을 놓치는 거다. 하기야 예전에 첫 근무지에서 진리를 깨닫긴 했지. 외모가 출중하긴 해도 진짜 이기적이고 불여시 같은 후배가 있었는데 그녀의 이중성을 말하자면 입이 아프니까 건너뛰겠다. 신혼 집들이에서 동료인 그녀의 남편에게 뭐가 제일 좋아서 결혼했냐고 물었다. 대답을 듣고는 쓰러질 뻔했다. 어이가 없어서. 착해서란다. 다들 표정 관리하느라 힘들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착해서라니. 남자에게는 ‘이쁜’ 게 ‘착한’ 거라는 거, 그것이 진리다. 아니라고? 거짓말!     


애교 넘치는 귀여운 부산 사투리를 쓰는 진미는 완도에서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유치원 선생님이다. 나이는 서른여덟. 완도 대교와 바다가 창문에 액자처럼 걸리는 학교 옆 연립 관사, 바로 내 옆방에 산다. 거기가 우리 아지트다. 관사 식구들이 이번에는 그녀의 실연 기념으로 배달 음식과 술을 놓고 모였다. 중학교 교사에게 차였단다. 그녀는 좀 더 알아볼 마음이 있었는데 상대방이 자기가 기간제라서 만나기가 미안하다는 황당한 핑계를 댔단다. 궁색 변명인가. 그런 이유면 처음부터 소개받지 말았어야지.     

     

그나저나 빚만 없으면 된다고? 그렇다면 우리 필재에게도 기회가 있으려나? 작년에서야 겨우 늦은 나이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데다 근무 지역도 섬이라서 좀 달리는 것 같아 생각도 안 했는데. 그동안 직업뿐만 아니라 사귄 여자도 거의 없이 방안퉁수로만 지냈지만 별명이 ‘선비’일 만큼 성품이 온유하다. 진미가 외모를 안 본다고는 해도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훈남이라서 점수를 얻고 들어갈 것이다. 둘을 조합해 보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이거 될 것 같은데? 서로 맘에 들어 할 것 같은 예감이 딱 든다. 필재가 바보같이 인물만 안 따지면 된다. 희망찬 그림이 그려진다. “공무원 된 지도 얼마 안 되고 너한테 부족한 것 같아서 주저했는데, 내 사촌 동생 한번 만나 볼래? 너랑 동갑이야.” 아싸! 좋단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그 자리에서 당장 8월 31일 토요일에 목포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9월 1일, 소개팅 바로 다음 날에 필재가 치원 아이들이랑 먹으라며 케이크를 들고 완도에 왔다 갔단다. 잘했어. 내가 놓치지 말라고 했지? 로또에 당첨되는 거라고. 주위에서 진미가 예뻐졌다고 난리다. 수더분하게 하고 다녔는데 화장이 화사해졌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더니, 원피스 위주로 신경 써서 차려입는다. 9월 13일, 추석이다. 필재가 부산 진미네 집에 인사드리러 갔다 왔단다. 2주 만에? 완전 불이 붙었구먼. 필재가 내게 따진다. 처음에 소개하면서 진미를 별로 이쁘지 않다고 말한 게 서운하다나? 참 나, 그거야 너무 기대할까 봐 그랬지. 내가 본 중에 최고로 성격 좋고 보석 같은 여자니 꼭 잡으라고 조언했던 건 생각 안 나나?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구나. 솔직히 말해서 평범한 거지, 그렇게 이쁘다고 할 수는 없지. 1월 4일, 둘이 결혼했다. 만난 지 달하고 4일 만이다.       

  

중학교 3년 동안 외삼촌 댁에서 신세 진 빚이 있다. 외숙모는 매일 도시락을 쌌고, 내 빨래도 했다. 맡겨진 아이치고는 씩씩하게 잘 지냈다. 눈치를 안 본 건지, 눈치가 없었던 건지. 눈치껏 잘했던 건지, 여하튼 뻔뻔한 아이였다. 고모 댁에 얹혀서 너무 힘들게 고등학교를 다닌 남편은 그런 내가 참 신기하단다. 아마, 외삼촌 내외가 허물없이 대해 주어서 그랬을 것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지 않는가. 큰아들 때문에 오랜 세월 마음고생이 심했던 외삼촌은 이제 살맛이 난단다. 앞날이 어두웠던 아들이 직장 얻고 결혼하더니 속도도 빠르게 손자까지 안겨 주었다. 복덩어리 며느리를 보게 해 주어 고맙다며 볼 때마다 싱글벙글이다. 며느리 출근하라고 손자도 두 분이 함께 봐 준단다. “외삼촌, 제가 빚진 거 한 방에 다 갚았습니다.” 너스레 떨며 큰소리친다. 명절이 오면 외삼촌이 선물을 들고 온다. "아이고. 삼촌, 뭘 이런 걸 다." 상황은 역전됐다. 인생 한 방이지.     


"진미야, 잘 지내고 있어? 필재는 잘해 줘?" "아유, 필재는 한결같죠. 처음이랑 똑같아요." "시윤이는?" "이제 어린이집도 잘 다니고, 동네 할머니들의 귀염도 한 몸에 받아요." "그래, 주말에 보건쌤이랑 서울에나 놀러 갈래? 시윤이 필재한테 맡기고." "좋아요. 제가 운전할게요. 저 운전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오, 우리 진미, 아직 살아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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