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어디야?” 아침 아홉 시 50분, 뜬금없이 막내딸이 전화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데, 왜?” “오늘 도서관 가서 책 빌릴라고 했는데 어떡해, 그러면?” 목소리에 짜증이 담기면서 톤이 높아진다. 방학이라 오늘도 쉬는 줄 알았나 보다.
또 시작이군.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와는 맥락 있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아이가 얼토당토않게 짜증을 부리는 이유는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어제 둘이 하루 종일 집에서 쉬었는데 그때 말하지. “아빠 없어? 아빠도 서예학원 간다고 하긴 했는데 아직 집이면 한번 부탁해 봐. 안되면 오후에 엄마 퇴근하고 같이 가서 빌리자.” 아무 대꾸가 없다. 조언대로 하기 싫다는 거다.
혹시나 하고 남편에게 도움 요청을 했더니 이미 학원이란다. 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100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했는데 어디서 타냐고 묻는다. 아이는 버스를 한 번도 혼자서 탄 적이 없다. 어디라고 하면 알까? “언니가 그러는데 100번 아니고 100-1번인가 그렇대. 그게 45분마다 한 번씩 온대. 더운데 오래 기다릴 수 있겠어? 그리고 어디서 내리는지도 잘 모르잖아. 오후에 엄마랑 가는 게 낫지 않아?” “아니, 지금 읽고 싶다고! 버스 타는 것 가르쳐 달라는데 왜 그래?” 막무가내로 버럭 화를 낸다. 대체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다고. “엄마도 안 타 봐서 잘 몰라. 왜 엄마한테 화내?” “엄마한테 화낸 거 아닌데?” “통화하면서 그러면 엄마한테 화낸 걸로 느껴지지. 엄마 기분이 나쁘잖아.” 내 어조도 높아지며 이제 둘의 감정이 모두 상해 버렸다. “엄마는 그런 것 좀 고쳐. 왜 그렇게 인성이 더러워?” 헉. 인성이... 대단히 잘 못 키운 거 맞지? 이게 자식이 엄마에게 할 소린가? 열불을 내고 이제 전화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단다. 걸어서 간단다. 흥! 그러던지.
폭염경보 문자가 울린다. 걸으면 30분 쯤 걸릴 텐데 얼마나 뜨거울까? 회원증도 챙겨서 가야 할 텐데? 미운 것도 잠시, 노파심에 전화했더니 안 받는다. 화났다는 표시다. 다시 시도해도 소용없자 집에 계시는 친정엄마께 회원증이랑 모자 챙겨서 가라고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가 버렸단다. 아래층까지 내려갔다 왔는데도 없단다. 나이 든 엄마까지 땀 흘리고 고생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범벅인 날씨다. 챙겼겠지, 뭐. 그리고 저도 고생도 좀 해 봐야지.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열심히 궁체를 연습하고 있을 남편에게 또 연락했다. 이러이러해서 아이가 혼자 걸어갔으니 학원 끝나면 도서관에 들러 데려오라고. 안 그래도 전화했더란다. 네이버 지도 검색을 하려는데 미성년자라 보호자 주민번호랑 뭐 넣고 승인받아야 한다면서. 으이그, 미치겠다. 걸어서 가는 길도 모르는 거다. 맨날 차로 다니는 길인데. 그냥 ㄴ자로 한 번만 꺾어서 가면 되는데.
휴대폰이 요란하게 빨리 받으라고 재촉한다. 막내다. 아깐 전화도 무시하더니 아쉬운 게 있나 보군. 도서관에 도착했는데 회원증이 없어서 못 빌린단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남편이 집에 가서 회원증을 챙겨 가야 한다. 여러 사람 귀찮게 한다. 잠시 후, 이번엔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누가 이미 대출해 갔다며 뭘 빌려야 할지 모르겠단다. 에휴! 청소년 베스트셀러 소설들을 검색해서 보내주었다. 인기 있는 건 대출 되었을 수도 있다고 미리 알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이제 그만하고 싶다. 남편에게 패스. 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딸내미가 짐이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친다. 짐이 무거워서.
퇴근했더니 아이가 에어컨을 켜고 안방에 누워 있다. 시원해서 그런지 기분은 좋아 보인다. 책 뭐 빌렸냐고 물었다. 내가 보내준 것들은 다 대출 중이어서 아무거나 두 권 빌려 왔는데 재미가 없다나? 엄마나 보란다. 진짜, 오전 내내 그 더위에 뭐 한 거니? 엄마한테 대들고 말 안 들으면 얼마나 힘든지 큰 공부 한 걸로 치자. 깨달았는진 모르겠지만.
“집에 올 때, 아빠한테 떡볶이집 앞에 내려 주라고 했거든? 여기 떡볶이가 양이 좀 적어. 그래서 2인분을 시켰어. 아빠가 만 원을 줬는데 계산하려니까 만 천 원이래. 너무 비싼 거 아니야? 그래서 집까지 돈 가지러 걸어갔다 왔다니까. 엄청 더워서 죽는 줄 알았어. 근데 나중에 보니까 가방에 만원이 더 있는 거야.” 우리 딸. 도대체 널 어쩌면 좋니? 잔소리는 꾹 참고 배운대로 공감해 주었다. “어이구야, 더운데 힘들었겠다. 잘 살펴보지 그랬어.” 뒤에 붙이는 말은 안 했어야 했는데. 실수! “그냥 운동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지.” 이번엔 야무지게 잘난 체하며 또박또박 말한다. 자신의 실수엔 퍽 너그럽군. 짜증 내고 억울해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저녁 먹고 보니, 에어컨도 없는 자기 방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춤 연습을 하고 있다. 시원한 데서 하라니까 엄마가 보면 안 된단다. 낼모레 남동생네 가족이 휴가차 놀러 온다. 다 모이면 장기자랑을 한다면서 제 사촌동생들에게도 준비해 오라고 단단히 이르는 눈치다. 동생들이 어떤 걸 할지 엄청 기대하고 있다. 대학생 언니한테도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게 어떠냐고 말해 달란다. 하겠냐? 웬 장기자랑? 이럴 땐 한참 어리다. 중학생답지 않게 귀엽다. 애가 어른이 되고 싶으니 뒤죽박죽이다.
‘어쩌라고’ ‘나가.’ 요즘 막내딸이 가장 많이 쓰는 말들이다. 아이의 무례를 참기가 힘들다. 별것 아닌 걸로 비난하거나 남 탓을 한다. 저 나름대로 결핍이나 서운함이 있어서 그러겠거니 마음을 다잡다가도 막상 맞닥뜨리면 나도 모르게 혈압이 오르면서 말에 가시가 돋치는 게 문제다. 아이도 절대 지지 않고 말대꾸한다. 길어질수록 어른인 내가 손해다. 나는 분명 훈육하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아이와 싸우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저번엔 참지 못하고 내게 부탁도 하지 말고 웬만하면 말도 걸지 말라고 해 버렸다. 아이도 그럴 거라며 대거리를 하더니 한 달 가까이나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안 하는 것이다. 나만큼이나 고집이 세다. 애를 이겨 먹어서 뭐 하리. 결국 마주 앉아 앞으론 마음이 언짢더라도 화가 풀리면 바로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서로 사과하기로 했다. 아이도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러자는 듯이 긍정의 침묵으로 답한 걸 보면. 사춘기의 통제되지 않는 생각, 감정, 신체 변화로 저도 혼란스럽고 스트레스받겠지. 이해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마음으로 공감하며 대화해야 한다. 그래, 이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막상 그 불꽃같은 순간을 참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첫째와 둘째 키웠을 때가 생각 안 난다. 그걸 겪었으면 더 잘해 내야 하는데 도대체 엄마 자격이 없다.
“엄마, 나 꿈이 바뀌었어.” “뭔데?” “모델. 오늘부터 10시에 잘 거야. 그래야 키가 큰대.” 지난달까지 유럽에서 살 거라면서 영어 공부는 안 하고 ‘영어 공부하는 법’만 눈 빠지게 이것저것 검색하면서 묻고 또 묻고 성가시게 하더니 이젠 ‘키 크는 법’에 꽂혔나 보다. 나도 ‘사춘기 딸과 대화하는 법’을 좀 찾아봐야겠다. 이대론 정말 못 살겠다. 나도 갱년긴데 사춘기 땜에 티도 안 난다. 제발, 누가 사춘기 좀 사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