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 잘못이야
발이 시리다. 발목이랑 정강이도. 깔끔한 흰색 벽에 여러 개의 상담실과 심리검사실의 문 색깔이 파스텔 그레이다. 두 색의 조화가 세련됐다. 재즈 피아노 곡이 공간을 감싼다. 나는 커피 머신에서 따뜻한 커피를 내려 소파에 앉았다. 새로 확장 개업을 했다는데 초록의 화분들과 깔끔한 인테리어에 기분이 차분해진다. 그나저나 코트까지 입었는데도 좀 춥다. 히터 온도를 높여 달란 말을 못 하겠다. 달랑 우리 밖에 없어서.
상담실에서 원장님이 나왔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의 흔히 볼 수 있는 아줌마 스타일이다. 펑펑한 바지에 외투 없이 보풀이 난 조끼를 하나 걸친 편안한 차림새라 그런가 전문가라는 느낌은 덜 풍긴다. 나이도 너무 많은 것 같다. 아이들과 잘 통할까? 처음 왔는데도 제대로 인사도 없이 막내만 데리고 급히 들어간다. 나중에 따로 결과 상담이야 하겠지만 손님맞이가 뭐 이래? 그러다 여유 없는 내 쪼잔함에 피식 웃음이 났다. 외모 선입견도 오지고.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겠지. 재즈 선율이 음울해진다.
안내해 주던 젊은 남자 직원도 금세 어디론가 들어가 버렸다. 궁금한 걸 물어볼 사람도 없고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는 게 뻘쭘하다.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 살펴본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나도 상담학과 대학원 나왔는데 좀 잘 보여서 나중에 명퇴하면 채용해 달라고 할까? 괜찮은데? 자격증부터 신청해야겠다. 6년이나 지났는데 발급해 주려나? 참, 코칭연수도 받았었구나. 은근히 배워 놓은 게 많구먼. 이론과 실기가 달라서 그렇지. 어휴, 제 아이랑 살뜰한 대화도 잘 못하고 말싸움이나 하는 주제에 내용도 다 잊어먹은 전공이 다 무슨 소용이랴.
휴대폰에 몇 자 두드리다 보니 벌써 한 시간은 넘게 지난 것 같다. 이제 금방 부모 상담을 하겠지? 막내는 홀가분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을까? 저 원장님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바로 좋아지긴 힘들겠지? 그나저나 왜 이리 떨리는 건지. 추워서 그런가. 게다가 두 번째 내린 커피는 사약을 마시는 것처럼 쓰다. 뜨거운 물을 더 부었다.
막내의 웃음소리가 수줍게 새어 나온다. "저는 이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어요." 이 말이 확실히 들렸다. 둘이 생각보다 할 이야기가 많았나? 그래. 돈값은 해야지.
종소리가 울리며 고등학생쯤의 남학생이 들어왔다. 맞아 주는 직원이 없다. 자기가 주로 가는 방으로 보이는 상담실 앞에 선다. 문에 세로로 길게 난 직사각형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더니 아무도 없는지 소파에 앉아 휴대폰에 눈길을 고정한다. 이곳에 익숙해 보인다. 훔쳐보니 얼굴에 그늘은 없어 보이나 좀 어수룩한 느낌이다. 어떤 문제가 있어 보호자도 없이 혼자 다닐까? 친구 관계? 학업 스트레스? 가족 문제?
일어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학생이 밖으로 나갔다. 화나서 가버렸나? 우리 막내가 들어간 지 한 시간 반이 넘어간다. 아이 한 시간, 부모 30분, 총 한 시간 반쯤 걸릴 거랬는데 나를 아직도 부르지 않는다.
몇 분 만에 아까 그 학생이 다시 들어와 앉았다. 잠시 후 막내와 원장님이 검사실에서 나왔다. 막내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상기되어 있다.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궁금하다.
원장님이 이미 30분도 넘게 기다린 학생에게 다가가 20분만 기다려 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학생이 작은 소리로 알겠단다. 만약 어른이었다면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게 어딨냐고, 내가 우습게 보이냐고 따졌겠지. 내가 센터 직원도 아닌데 학생에게 미안하다.
막내를 소파에 남겨두고 원장님과 함께 들어갔다. 첫마디가 그림 그리는 데 1시간 20분이 걸렸다는 것이다. 둘이 상담하느라 시간이 간 게 아니라 그리는 데 오래 썼다는 말이다. 에이포 용지에 연필로 그린 그림 두 장이 놓여있다. 첫 번째엔 집과 나무. 그리고 연못을 들여다보는 사람 한 명, 두 번째 종이엔 식탁에 가족 여섯 명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정성스레 그린 편이나 그래도 너무했다. 보통 아이들은 3분, 3분 해서 6분쯤이면 끝내고, 아무리 길게 걸리는 아이도 10분씩 20분을 넘지 않는단다. 사람을 그리는 데 특히 더 오래 걸렸는데 지우고 또 지우고 하는 걸 스무 번까지 세다 말았다고 한다.
짐작했던 내용들이 줄줄이 원장님의 입에서 나온다. 지나친 완벽주의로 수행에 어려움이 있고, 조그만 지적에도 상처를 받는 예민한 아이, 목표는 한없이 높은데 또래보다 능력이 부족해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아 사는 게 힘겨운 아이란다. 나쁜 상상이 증폭되어 본인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괴로울 거라 했다.
이런 아이들은 초등 고학년,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바로 왔어야 좋은데, 중 2면 좀 어렵고 더딜 수 있다고. 꼭 부모들이 이렇게 나빠졌을 때 온다고. 죄책감에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댄다. 아, 좀 더 빨리 올 걸.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어릴 때 이쁨 받고 자란 늦둥이 중에 자율성이 떨어져 나중에 이렇게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단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물었다. "언니들한테는 신경을 쓰신 것 같은데 막내라고 좀 많이 내려놓으신 것 같네요. 지금부터 하나하나 배우며 결국은 본인이 극복해 내야죠. 본인이 많이 힘들 거예요." 내 문제 있는 양육방식 때문에 아이가 고생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네 잘못'이라고 쐐기를 확실히 박는 것 같다.
아이가 자신의 예민한 성향을 알게 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 빠르게 수행하는 연습을 하게 옆에서 엄마가 코칭해 주면 좋은데, 사춘기 특성상 엄마 말을 잘 안 들으니 상담사 선생님이랑 같이 해 보자고 한다.
당장 그러자고 했다. 갈등이 있더라도 이것저것 야무지게 해 낼 수 있게 시켰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게을렀다. 능력이 안 되는 아이가 스트레스받는 게 싫어서, 강요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게 했던 게 결국은 이렇게 아이를 힘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니. 다 맞는 말인데, 나도 그렇게 예측하고 있었던 바인데도, 어쩐지 서운하다. 그렇더라도, 지금이라도 잘 왔다고, 금방 좋아질 수 있다고, 희망적인 말을 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상담실에서 나와 남자 직원이랑 다음 방문 일정을 잡는데, 여태 기다리고 있던 남학생이 휘적휘적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온 학생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막내를 코칭해 주실 분은 1급 청소년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보유한 실력 있는 선생님이란다. 아직 만나진 못 했지만 왠지 원장님이 아니라니 더 좋았다.
진짜 열심히 해야지. 우리 이쁜 막내딸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도울 수만 있다면 내 휴대폰도 던져 버릴 수 있다. 아이를 데리고 센터 문을 나서는데, 오솔오솔 떨리는 게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