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을 해도
아침 일찍, 진료 1시간 전에 왔는데도 정형외과 진료실 앞에는 이미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있다. 일흔에서 여든은 된 듯하다. 1번 할머니는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하다. 2번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 동그랗게 말려있다. 두 분 다 얼굴이 까맣고 손이 갈퀴처럼 구부러진 게 한눈에 봐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 온 분들이다. 깁스에 목발을 짚고 캥거루처럼 겅중거리며 오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눈을 피하며 3번 자리에 앉았다.
어제 오후에 오랜만에 배구를 하다가 상대편 선수의 발을 밟고는 발목을 접질렸다. 급하게 병원을 찾았으나 시간이 늦어 응급실에서 반깁스만 하고 아침에 다시 정형외과에 왔다. 집에도 못 가고 관사에서 대충 자고 나왔더니 꼴이 엉망이다. 한쪽 발로 뭘 할 수 없어 겨우 세수만 하고 어제랑 같은 옷을 입었다.
김복순 씨를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다. 1번 할머니가 허리는 반듯해도 귀는 잘 안 들리나 보다. 진료가 끝나고 나온 할머니에게 간호사가 수납하고 주사실로 가라고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이른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머니가 왼쪽 복도로 간다.
"아니, 할머니. 반대쪽이요. 수납 창구 옆에 주사실이 같이 있어요!"
간호사가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으응, 나도 주사실 어디 있는지 알어. 저짝 신경외과에 우리 영감님이 진료받고 있어서 같이 갈라고."
"왜요. 먼저 가셔서 주사 맞고 기다리시제."
"아니여. 같이 갈라고."
옆에 계시던 2번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끙 일어나면서 늙은 앵무새처럼 중얼거린다.
"어따, 먼저 가서 맞음서 기다리믄 되제, 꼭 저렇게 같이 다닌다고 난리여."
한 마을 사람들인가? 평소에도 어지간하시나 보다.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나이 들어도 사랑받는 여자와 질투하는 여자가 있는 건 마찬가지구나. 나도 사삭스러운 건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허리가 둥그런 할머니의 투덜거림이 재미있다. 1번 할머니가 귀가 좀 먹어 다행이기도 하고.
무표정한 의사 선생님이 어제 응급실에서 찍어 놓은 엑스레이 사진을 살펴본다.
"어제 저녁에 응급실에서는 엑스레이 보시고 네 번째 발가락 윗부분에 금이 갔다고 하던데요. 한 6주는 깁스를 해야 할거라고요."
설명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보지도 않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뼈에는 이상 없어요."
역시 무뚝뚝하다.
"네? 아, 다행이네요."
응급실에서랑 진단이 너무 달라 좋으면서도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의심이 든다.
뭔 설명이 없어 뻘쭘하게 기다리는데, 약을 지어준다는 말만 짧게 한다. 아무리 반깁스를 해 놨지만 발의 상태를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붕대 풀어 확인하고 다시 두르면 되는데.
"발등이 많이 부었고요. 멍도 들기 시작했어요. 인대에 이상이 있을까요?"
걱정이 되어 또다시 묻지도 않는데 상태를 설명했다. 이미 의사는 발을 확인할 생각은 없다. 귀찮은가?
"아픈가요?"
"가만히 있으면 괜찮고요. 닿으면 아파서 디딜 수는 없어요."
"그럼 주사 한 대 맞고 가세요."
웬 주사? 다 됐다는 제스처에 다급해져 마지막으로 물었다.
"언제 다시 오면 되나요?"
"일주일 뒤에도 아프면 오세요."
"아... 감사합니다."
뭔가 찜찜하다. 발 상태를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발을 접질렸는데 영양주사를 주는 것도 이상하다. 이건 딱 봐도 과잉진료 아닌가? 아, 주사는 필요 없다고 말할걸. 호구 같아 기분이 별로다. 진료실 밖 의자에 두었던 가방을 크로스로 다시 매고, 천으로 된 쇼핑백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넣고 수납창구 쪽으로 발을 뗐다. 목발이 익숙지 않아 옆구리 근육이 아프다.
접수할 때부터 보고 정형외과 진료실로 데려다주었던 보조원 아주머니가 이번에도 달려와 짐을 건네 들었다. 친절하게 내 카드를 받아 수납까지 돕고 주사실로 안내한다. 예순은 넘어 보이는데 표정이 밝고 말투도 친절하다. 환한 미소는 주변까지 밝게 해 준다. 이런 사람을 가끔 본다. 자신이 맡은 일을 감사하며 즐겁게 하는 사람. 이 병원에서 직원을 잘 뽑았네.
주사실 앞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바로 옆에 탁자 하나 두고 서 있는 제복 입은 남자분이 날 쳐다본다. 병원 경비원이나 아니면 아까 그분처럼 보조원쯤 되나 보다.
"어짜다 다쳤소?"
"운동하다가요."
"운동을 제대로 해야제. 저한테 맞는 운동을 해야 써. 강도가 세다고 좋은 거이 아녀. 나 봐봐."
가만 보니 발 뒤꿈치를 들었다 놨다 1초에 서너 번쯤의 속도로 하고 있다. 좀 촐싹 맞아 보여 우습긴 했지만 이렇게 서 있어야 하는 사람에겐 최고 적합할 듯싶다. 아저씨 얼굴에 활력이 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게 성격이 아주 좋아 보인다.
"운동이라는 것은 말이여...."
이런, 큰일이다.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어정쩡하게 웃으며 듣고 있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을 불렀다.
"이모, 이쪽에 다리 올리고 반듯이 누워요. 어쩌다가 다 큰 사람이 다리를 뿔라 묵었대?"
간호사가 다리 쪽에 베개를 놓고 침대를 탁탁 두드리며 높은음으로 명랑하고 유쾌하게 지시한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데 나더러 이모란다. 반말을 섞어 친척으로 만드는 게 이분도 일단 예사롭지 않다. 곱게 빗어 넘겨 망사핀으로 동그랗게 만 머리와 갈매기 눈썹과 리듬이 있는 걸걸한 목소리에서 에너지가 넘친다.
"가방은 왜 매고 있어. 누가 가져갈까 봐?"
크로스로 매고 있던 가방을 벗겨 내어 쇼핑백과 함께 옆에 가지런히 걸어둔다. 내 왼 팔 소매를 걷어 내고는 팔꿈치 안쪽을 찰싹 때리더니
"혈관 한 번 볼게요. 아! 베리 굿이야. 낙지 장인이 구녕만 봐도 낙지가 나올지 안 나올지 알 듯이 우린 딱 보면 알어. 혈관 좋아. 아멘."
쿡. 웃음이 빼져 나온다. 요즘 시를 배우는데, 거기 시인 선생님이 직유를 많이 찾으라고 했다. 직유 고수가 여기 있었네. 말투는 딱 유튜브에 나오는 무속인 같은데 하나님을 자주 찾는다.
"이거는 마른 논바닥에 물 들어가듯 온몸에 영양을 주고 힘을 줘서 몸을 가뿐하게 해 주는 영양제. 가격은 3만 3천 원. 요즘 신제품이고 다 맞고 보면 왜 좋은지 알 거야. 더 질문 있어? 이모?"
"다 맞으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천천히 맞으면 30분, 빨리 맞으면 15분, 적당히는 20분. 아침이라 빨리 맞는 건 안 권해."
"네. 적당히 해 주세요."
"자. 바늘 들어간다. 바늘 부드럽다."
말하는지 노래하는지 주문을 외우는지 구별이 안 간다. 일을 재미있고 신나게 하는 사람을 몇 알지만 이분은 그중 최고다. 내 양쪽 팔을 십 일 자로 만들어 내리고, 다리를 꾹꾹 주무르더니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나간다. 이불속에서 팔을 빼면 안 될 것 같아 미라처럼 누워있다 한참 만에 휴대폰을 몰래 꺼냈다. 이 병원 이상한데 재밌어.
커튼이 쳐진 옆 침대로 할머니 환자가 들어오나 보다.
"언니, 죽겄다는 소리 하지 마. 안 죽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어?"
족보가 많이 헷갈리네. 할머니가 주사 바늘을 많이 무서워하나 보다. 아까 사랑 받는 그 할머닌가? 킥킥.
"나 화장실 먼저 갔다 와도 되끄나?"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이어지는 레몬처럼 위트 있는 간호사의 대답에 푸하하하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화장실? 언니,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선택해야지. 뭐더러 나한테 물어?"
이 시골종합병원 사람들, 의사 빼고 다 맘에 든다. 하하하.
(아! 의사도 사진만 봐도 아시는 명의네요. 발이 빠른 속도로 낫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