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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뜬 밤

보이지 않아도

by 솔향

자정쯤 불을 껐다. 자려는데 방이 너무 훤했다. 웬일이지? 잠깐 멍해있다 정체를 확인하러 창가로 갔다. 아주 조금 기운, 거의 보름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그란 달이 떠 있었다.


달은 그저 작고 얼룩진 회색 동그라미일 뿐인데 반사된 빛은 이렇게나 세상을 가득 채우고 방까지 가득 들어와 내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다는 게 문득 놀라웠다. 커튼을 닫고 캄캄하게 만들어 잠을 청해야 내일 출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신비로운 달빛 때문이었으리라. 커튼을 잡았던 손을 내리고 침대에 웅크리고 모로 누웠다. 창문 밖에 멈춰 있는 달을 좀 더 보고 싶었다.


가로로 길게 난 창문의 왼쪽 편 가운데쯤에 보름달이 쏙 들어와 있었다. 기다란 액자 틀과 그 안에 그려진 여백의 미가 있는 작품처럼. 바탕은 아이들이 미술 시간에 밤을 색칠할 때 쓰는 검정도, 남색도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밝은 남회색이라고 해야 아주 조금은 비슷해지려나. 옅은 안개처럼, 아니 그보다는 훨씬 화사한 연회색 달빛이 포근하게 내 몸을 감쌌다. 자정이 넘은 시간 때문이었을까? 눈도 몇 번 깜빡이지 않고 달을 바라보는데 달도 시간도 움직임을 멈춘 듯 묘한 기분이었다. 소리조차 삭제됐다. 온 우주에 달과 나만 떠 있는 느낌. 하늘에 떠 있는 신비로운 동공이 내 눈동자와 서로 눈 맞추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길을 피하지 말고 시를 쓸 타이밍이다.


여덟 살, 심하게 아팠던 겨울밤이 생각났다. 저녁부터 열이 높았는지 엄마 아빠의 걱정 어린 소리가 들려왔다. 동생들을 제치고 내가 엄마 아빠 사이를 차지했다. 병원도 약국도 없는 섬이었다. 해열제 따위 준비됐을 리도 없다. 병간호 지식도 부족했을 것이다.


겨울이어서, 혹은 웃풍이 세서 그랬을 것이다. 아빠가 이불을 덮어주는데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온몸엔 힘이 빠지고 열은 펄펄 끓었다. 너무나 답답했다. 이불을 걷어 차도 자꾸 끌어다 놓는 아빠의 손길이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좋았다. 그 손이 따뜻해서. 깊은 그 마음이 전해져서. 그래서 죽을 것 같아도 참았다.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쉬가 마렵다고 거짓말을 했다. 오줌을 싸려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마당 구석에 있는 수채구멍으로 가야 했기에 평소엔 마려워도 귀찮아서 끝까지 버티곤 했는데 말이다. 힘이 없고 어지러워 휘청휘청했다. 주저앉거나 쓰러지면 아빠가 달려와 날 안아갈 거란 생각을 했다. 밖에 나가자마자 짜릿한 겨울 냉기가 내복만 입은 온몸에 밀려왔다. 너무 시원해 얼음 동동 띄운 생명수라도 마시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오래 마당에 있고 싶었다. 뜨겁고 답답한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수채구멍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보았다. 오늘처럼 보름달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마당 옆 밭에서 보리 새싹이 흔들렸다. 달이 가만히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자 아빠가 나왔다. 춥다고 내 손을 잡았다. 요 위에 누워 다시 이불을 덮었지만 금방 잠이 들었다. 아마도 차가운 공기를 쐬고 나서, 열이 점점 내렸나 보다.


보름달을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그 밤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그보다 그 밤 달이 위로해 주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열에 들뜬 몸, 젊은 엄마 아빠의 품. 그들의 사랑도.

그대로 오래 머물 줄 알았던 달이 어느새 오른쪽으로 많이 치우쳤다. 점점 속도를 내더니 창틀에 걸쳤다. 그러곤 잽싸게 창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쉬웠다. 창문으로 달려가 내다보면 비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밖이 여전히 은은하고 환하게 빛나는 걸 보면 그대로 누워 있어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다는 것을. 강한 해가 나와 달빛을 모두 거둬들인다 해도 달은 여전히 늘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도.


어쩌면 달처럼, 내 젊은 아빠도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오늘 밤은 커튼을 열어두고 잠들어야겠다.



보름달

솔향


창문 밖이 훤하다

커튼을 닫으려다 말고

바로크벤자민 잎처럼 몸을 말고 모로 누웠다


검푸른 네모의 세계에

동공 하나가 홀로 빛난다

시간과 파동이 멈추고

안개같이 뿌윰한 빛이 나를 감싼다


멈춰 서 이쪽을 본다

눈동자가 마주친다

서로를 확인하듯 깊이 어루만진다


열이 펄펄 끓던 여덟 살

자꾸만 덮어 주는 아빠의 걱정

숨 막힐 것 같던 겨울 밤

이불 속을 벗어나 쪼그려 앉은 마당가

박하 같은 냉기를 온 몸으로 들이키고

올려다본 하늘에서 지켜보던 그 동공

맞지?


머물 줄 알았던 시간이 다시 걸었다

오른 쪽 창틀 끝에 걸터앉았다

사라졌다


바깥은 여전히

퍼져나가는 기억처럼 은은하고

젊은 아빠의 싱그런 눈꼬리처럼 넉넉하다

이제야 알겠다

보이지 않아도 늘 거기 있다는 걸


*시쓰기 쌩초보의 연습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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