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2 작성
악취 나는 폐수 같은 깊은 원망과 짙은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직하고 싶었던 빛나던 것들만이 들어찼던 서랍장을 전부 비운 것만 같은 공허함만이 남았다.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던 사람들을 잃은 나는 그저 죽어가는 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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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어른을 알려주었던 이는 내가 밀쳐내었다. 한참을 올려보던 이를 이제는 조금 높아진 눈높이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그 품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오래된 이야기이다. 가족을 제외하면 내가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인 첫 사람이며 첫사랑일 것이다. 나는 내 어른에게 조건 없는 애정을 주었다. 누가 보면 맹목적인 추종이라도 하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맹목적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바쁜 부모를 보며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기다림에 지쳤고, 수없이 반복된 기다림의 패턴에 질려 그 요람을 떠나 홀로 서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어린 마음과 다짐을 지금까지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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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흩날리고 무게에 짓눌리는 계절에 씁쓸하지만 달큼한 향을 풍기는 이와 닿았다. 기다림이 질렸던 나는 질린 만큼 익숙했기에 기다린다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든 연락을 할 수 있고 연락을 하고 싶을 때 하는 그런, 나에게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보란 듯이 박살이 났다. 귓가에 항상 머무는 잔잔한 음악들은 나와 그이가 가까워지게 만들었고, 깊이라는 단위가 생겨난 관계는 나와 그이가 아닌, 감히 우리라고 할 수 있는 내면과 가치를 공유하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 것은 내 오만한 착각이었다. 돌연 잠적해버린, 아직 빛을 발하는 별이 더 반짝일 수 있게 만드는 말들을 잔뜩 주고 떠나버린 그이는 내가 관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정한다. 나는 그이에게 관대했다.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다. 서로가 소중하다는 말로 애틋함만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 모든 달콤한 말들에 나는 관대해져버렸단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내 찌질하고도 어린 마음은 그이의 사랑을 질투했고, 멀어졌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어김없이 애틋함을 던지는, 또 그것에 미소 짓는 내가 의문스러워졌다.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더 이상 그이에게 관대하지 않고 관대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악의 없는 포옹에 내 눈이 멀어버렸음을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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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친구 목록과 전화번호부를 정리했다. 그 의미 없는 장부를 나는 의미를 담고자 약간의 관심사들을 포함하여 내 사람들 위주로 기록하고 남겨놨었다. 서랍장을 비워냈으니 더 이상 남아있으면 안 될 그 기록들을 나는 지워냈다. 나를 보면서도 내게 닿지 않는 모든 이들을 나는 떠나보낼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었다. 당장 30분 뒤에 등을 돌리더라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예외는 없었다. 관대함을 인정한 나는 더 이상 관대하지 않았으니. '나는 더 이상 네 주변을 맴돌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리 마음을 먹자 길었던 서운함과 섭섭함은 무너져내렸다. 만능이 아닌 내 단단함은 이번만큼은 딱 맞는 퍼즐이었던 모양이다. 내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는 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잊은 모든 이들은 나를 떠나갔을 것이다.
나를 잊은 모든 이들에게서 나는 떠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기억을 갖고 있을 나는 나 혼자만이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 아픈 것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나는 무리하지 않고 하나씩 잊으며 한 명, 한 명으로부터 떠나간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그 연약한 줄이 끊어지며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