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는 우열이 없다.

(2022.03.15 작성)

by 휘진

여긴 누가 더 슬픈지 재 보는 곳이 아니야. 살다가 지친 사람들이 와서 치유하고 다시 태어나는 곳이라고.

-오가와 이토,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


슬픔에는 우열도, 순위도 없다.

나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만큼 우울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며, 그렇기에 나보다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나보다 불행하란 법도 없다. 슬픔은 상대적이다. 어느 순간에도 절대적일 수 없는 무형의 것이다.​


종종 공감을 잘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해주지 않는 것도 아닌 공감이란 것 그 자체를 아예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개 타인의 슬픔을 지나치게 비교한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슬픔을 판단하며 때로는 그 판단으로 선을 넘기도 한다. "에이, 그 정도는 힘든 것도 아니지.", "무슨 그런 걸로 그러냐? 내가 더 힘들어." 같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말들로 상처 아닌 상처를 남기기도 하며, 할 말이 사라지는 것도 맞고, 할 말이 있지만 하지 않게 하는 말들이기도 하다. 내 아픔을 판단하고 가늠해달라 한 적조차 없음에도 던져대는 계산적인 언행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큰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겪어봤다. 내가 더 힘들다고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데도,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한 모양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도 나오는 부분이다. 스쳐 지나가지만.


"내 인생이 너보다 낫지 않고, 너 불쌍해서 사주는 거 아니고 고맙다고 사주는 거야."

빚에 쫓기며 부모님 없이 할머니를 모시고 힘겹게 인턴 생활을 해 나가는 고슴도치 같은 20대 초반의 이지안과 부장 지위임에도 상사의 무시와 핍박, 대학 후배가 자신의 회사 대표, 자신의 아내는 그 대표와 불륜, 소원해진 부부 관계를 살아가는 40대 박동훈. 서로가 서로의 슬픔에 대해 무시하지 않는다. 드라마 리뷰는 아니라 자세히 풀지는 않겠지만 저 대사에서도 상대적인 삶의 힘듦을 의미했지 이지안의 굴곡진 삶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모두가 은연중에 서로의 삶을 비교하며 온정 없는 공감을 나누고 있을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상대적임을 인정하고 인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서로 자신이 힘들다 하며 우열을 가리고 비교하며 굳이 꺼내지 않아도 좋았을 심연과 나열해놓은 슬픔을 보며 더한 우울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참 힘들게 살았다며, 지금보다 괜찮아질 거라며 다독여주는 것이 건강하게 슬픔을 대처하는 것이 아닐까.

행복만 할 수 없는 것처럼 슬프기만 할 수도 없다.

슬퍼할 여유와 고된 시간을 토닥여 줄 수도 없으면 슬픔이 아주 보통의 감정이 되어버릴 것이다.​


파란 세상이 되다 못해 잿빛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큼의 디스토피아도 없으니, 오늘도 한껏 해이해진 마음으로 저마다의 슬픔을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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