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우수(雨水)

by 휘진

무너져버렸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더니, 단단히 얼어있던 내 우울이, 그만 봄 대신 쏟아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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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싫증이 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도, 내가 사는 삶에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나는, 어제 무너졌다. 봄을 맞아 밖으로 나올 생각이어서 무작정 나왔다. 오늘 오후의 기온 17도, 초 미세먼지는 나쁨이지만 하늘은 회색빛을 띄지 않았다. 초록은 아직 거리에 피어나지도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봄이라고, 너희들이 기다리던 봄이 이제 거의 다 왔다고, 그리 알리는 듯한 날씨다. 이 좋은 날씨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전곡을 들으며, 내가 좋아하는 거리를 걸으며, 내가 좋아하는 사진들을 찍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기분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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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퇴사를 결심했다. 4월 1일이든 5월 1일이든 6월 1일이든 이곳을 떠나야 될 때가 왔다고 그리 생각하고 사직서를 미리 써놓았다. 내 결정이 사내에서 지탄받게 되더라도 나갈 용기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다니기로 마음을 잡았던 건 팀장님 때문이며, 덕분이다. 그런데, 팀장님이 퇴사를 한다. 결정을 존중하고, 아니 잠시만. 애초에 존중이고 뭐고 할 것이 없다. 그분이 내린 결정에, 내가 받았던 지지에 의구심 따위 품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충격이 생각보다 강했다. 그럴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고, 그러겠다는 확신도 가졌고, 마음도 다 잡고 마주했다. 그랬지만, 본인에게서 직접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앞은 어두워졌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실제로 그 이후 5분 동안 내 시야는 흑백이었다. 놀고, 마시고, 먹고, 재밌는 것을 보아도 그 순간이다. 순간뿐이다. 지속되지 않는다. 찰나의 시간 동안 잊고, 그것이 끝나는 그 찰나의 시간에 또다시 상기되는 충격이다. 차분한 우울감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차분한 우울감보단,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고장 난 우울감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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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와 거리를 걸은 것이 1시부터, 2시간도 채 걷지 않고 카페로 들어와 글을 중간 이상 써 내려간 지금의 3시 15분. 가방은 떨어트려 노트북 키보드에는 금이 갔다. 2월 27일에는 일본으로 여행도 떠난다. 이럴 줄 알고 계획한 여행이 아닌데,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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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말이 입가에 계속 맴도는 2월하고 20일까지의 하루들을 보냈다. 누굴 좋아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감정을 전해 받고 있지도 않는 일상임에도, 그냥 입 밖으로 그 단어만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 세상아, 사랑해. 내 감정들아, 사랑해. 사랑하니까, 이제 그만 나 좀 꺼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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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내게 22번의 걸음과, 작성해야 할 글이 남아있다. 하지만, 한 걸음 내디뎠던 나는 오늘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나버렸다. 다음 절기까지 달리는 법을 기억해 내는 것이 나의 숙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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