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근처에서 만나는 전통의 하루
근무지를 강남의 문정동에서 강북의 광화문 사무실로 옮긴 지 5개월이 지났다. 요즘 하루는 지하철 5호선 을지로4가역에서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무실은 광화문 근처이지만, 두 정거장 먼저 내려 청계천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약 3킬로미터를 걷는 아침 산책이 일상이 되었다.
특히 5월과 6월의 아침은 기온이 높지 않고, 아침햇살이 뒤에서 비추어 눈부시지 않아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맞이하는 조용한 아침 시간은 생각보다 더 큰 평온을 안겨준다.
지하철의 붐비는 틈바구니에서 하루를 시작하면, 벌써부터 낮시간 발주처와의 PM/CM 업무 스트레스가 머릿속을 점령한다.
하지만 을지로에 내려 청계천을 걷는 동안, 잉어가 물길을 가르고 백로가 물가에 선 풍경이 차분히 마음을 씻어낸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아래, 하루는 다시 숨을 고르며 새롭게 마음을 다지게 된다.
사람들로 북적이기 전, 청계천은 고요하고 청명하다. 아침 햇살이 물 위로 반사되고, 천변을 따라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시선을 끈다.
물속에서는 유유히 헤엄치는 살 오른 잉어들, 자맥질을 하는 청둥오리들, 때로는 고요하게 돌 위에 청아하게 선 백로의 모습이 고고해 보인다.
도심의 분주함과는 거리가 먼, 사색과 여유가 깃든 장면이다. 천천히 흐르는 물과 생명들의 움직임, 바람결이 어우러진 이 길은 단순한 통근 경로를 넘어 하루를 여는 작은 일상이 되었다.
청계천 산책길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벽면에 길게 이어진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타일 벽화다. 타일 벽의 총길이가 192m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타일 벽화로 조선 시대 정조대왕의 행렬이 세밀하게 묘사된 이 타일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청계천을 지나는 매일의 걸음을 역사적인 순간과 맞닿게 해주는 문화적 지점이다.
강을 따라 펼쳐진 행렬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걷는 시간은, 아침 산책을 한층 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준다. 물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그림 속 조선의 장면들은 도심 속에서 조용히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접점을 형성한다.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엔지니어로서 시선이 저절로 향하는 곳이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삼일빌딩이다. 1970년에 준공된 서울 최초의 고층빌딩 중 하나로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했던 이 건물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검은색 유리 커튼월의 외관은, 과거와 현재의 서울을 동시에 담아내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한때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삼일빌딩이, 이제는 세월의 깊이를 안고 더 세련된 도시의 얼굴로 다시 태어났다. 리모델링된 삼일빌딩은 청계천을 따라 걷는 이들에게 과거의 서울과 현재의 서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무언으로 전하고 있는 듯하다.
청계천을 따라 광화문 사무실까지 걷는 길은 짧지 않지만, 오히려 그 여유로운 걸음이 하루 전체의 리듬을 차분하게 조율해 준다.
강남의 생활에 익숙했던 탓에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던 강북의 정서도, 이곳에 머무르며 서서히 익숙해졌다. 행정과 언론의 중심지로만 알고 있던 광화문은 사실, 전통과 문화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서울의 깊은 뿌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점심시간에는 주변 궁궐을 산책하는 것을 작은 루틴으로 만들었다.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은 직장인을 위한 10회 입장권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세 곳의 이용권을 구입해 번갈아 산책하며 걷는 코스로 삼고 있다.
궁궐 안을 걷는 동안 느껴지는 고요함과 정갈한 자연, 그리고 전통 건축의 선은 일상의 업무로 받는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적합하다. 빠르게 흐르는 도시 속에서도, 천천히 걷는 이들만이 마주할 수 있는 순간들이 궁궐 안에는 존재한다.
경복궁의 웅장함, 덕수궁의 석조전과 근대적 건축, 창덕궁 후원의 비밀스러운 숲길은 각각 다른 결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점심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걷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감상이 된다. 전통을 보존한 공간에서 흘러가는 자연의 시간은, 현대의 빠른 삶 속에서 잊기 쉬운 ‘느림’과 ‘깊이’를 일깨워 준다.
서울에 오래 거주했지만, 도심 한가운데에 이토록 많은 전통문화 공간이 있다는 사실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청계천 산책로, 경복궁과 창덕궁 외에도, 광화문 광장, 북촌과 서촌의 한옥마을, 인사동 거리 등은 서울의 역사와 정서가 살아 있는 장소들이다.
이들 공간은 국내 시민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북촌 한옥마을의 좁은 골목에는 옛 고택들이 늘어서 있고, 그 속에는 맹사성 집터, 전통찻집, 공예 체험 공간, 문화 카페 등이 현대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한복을 결혼식장에서나 볼 수 있지만 외국인들은 왕의 복장부터 무인의 복장까지 두루 갖춰 입고 오히려 도심을 누비는 모습이 보기 좋다.
북촌의 한옥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고, 한복을 입은 채 사진을 찍으며, 붓글씨나 한지 공예를 체험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전시나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살아 움직이는 우리 전통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해외여행을 하는 동안 늘 부러워했던 유럽 속의 모습들이 이곳 서울 강북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이제야 비로서 직접 느끼게 되었슴을 늦게라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광화문 인근에는 세종문화회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역사박물관 같은 문화시설도 즐비하다. 소규모 갤러리와 전시장, 작가들의 작업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일상 속에서도 예술과 마주할 수 있다.
덕수궁 석조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근대화 흐름을 반영한 상징적 장소다. 서양식 건축과 전통 궁궐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시대의 전환점과 그 속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는 전통과 자연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걸어가는 듯한 이곳의 고요함은, 현대 도시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감정이다.
경복궁 역 앞 마을버스 9번으로 몇 정거장을 가면 5분 내로 인왕산 입구의 수송동 계곡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약 10 정도 인왕산 도로를 따라 오르면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초소 책방에 다다를 수 있다. 이곳 또한 점심시간에 자주 들르는 장소가 되었다.
과거와 현재, 권위와 일상, 전통과 현대가 겹겹이 얽힌 공간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하나의 사유이자 체험이 된다.
사무실 가까이에 자리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는 언제든지 찾아가 마음에 드는 책을 직접 고르고 넘겨볼 수 있는, 도심 속 열린 서재 같은 공간이다.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짧은 여유가 생길 때면, 온갖 책들이 가득한 매장 안을 천천히 거닐며 새로운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을 만나는 일이 일상의 즐거움이 된다. 바쁜 업무 속에서도 두 서점은 마음을 환기시키는 창구이자, 삶의 균형을 되찾게 해 주는 지적인 안식처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론 뮤익(Ron Mueck)의 개인전을 관람했다. 인간의 일상적인 순간들을 극사실적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압도적인 크기와 섬세한 디테일로 보는 이를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조용한 전시장 안에서, 작품 하나하나가 건네는 묵직한 시선과 감정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
퇴근 후 들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서양미술 400년, 명화로 읽다》 전시는 도시에서의 하루를 예술로 마무리하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인상주의의 부드러운 빛과 색, 고흐의 불타는 붓질, 피카소의 파격적인 형상, 앤디 워홀의 대중문화적 감각까지 한 자리에서 흐르듯 관람할 수 있었다.
5시 30분 퇴근 후 저녁 7시 전시 마감 시간까지 꽉 채워서 관람을 마쳤다. 서울에 살면서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시를 관람할 정도로 그동안 정신없이 살아왔다. 따뜻한 조명이 어두운 전시장 안을 비추고, 고요 속에서 작품의 숨결이 더욱 또렷이 느껴졌다.
술 한 잔 대신 예술 한 잔으로 하루를 정리한다는 표현, ‘퇴근 후 미술 한 잔’이라는 말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일상의 모든 순간들이 도시의 전통과 조우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하루. 광화문에서의 생활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를 다시 바라보게 해 준다. 현대적인 도시의 외피 아래, 오래된 숨결이 여전히 고요히 흐르고 있음을 느끼는 날들이다.
최근, PM 단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으며 마음의 부담과 스트레스가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아침의 청계천 길, 점심시간의 궁궐 산책과 저녁의 미술관 한 귀퉁이는 깊은숨을 고를 수 있게 해 주는 안식처가 된다.
도시의 중심에서 매일 마주하는 전통의 풍경과 문화의 온도는, 빠르게 소모되는 업무의 긴장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도록 단단하게 붙잡아 준다. 위기의 순간마다, 광화문에서의 이 일상은 마치 균형추처럼 삶을 다시 수평으로 되돌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