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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졌던 아버님의 선물

by 박홍섭

# 잊혀졌던 아버님의 선물

요즈음 《세상의 용도》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1953년, 니콜라 부비에(Nicolas Bouvier)와 티에리 베르네(Thierry Vernet)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발해 유럽을 지나 중동,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에 이르기까지 2년에 걸친 여정의 기록이다.

모두 669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관광지 소개나 사건 중심의 여행기가 아니라 여정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두 여행자의 내면을 성찰하며 써 내려간 이야기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이들은 그저 낯선 길을 걷는 여행자가 아니라, 낯선 세계 속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사유의 행위자로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이들의 시선이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몽상처럼 가볍게 다가오는 순간, 문득 오래전 기억 속 다른 한 사람의 여정이 떠올랐다. 바로 김찬삼 교수였다.

1958년,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그 시절, 그는 혼자서 세계로 나아갔다.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조차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그는 교수라는 신분으로 세 번의 세계 일주와 스무 차례가 넘는 테마 여행을 감행했고, 여행으로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무려 14년에 이른다.

그의 여행 기록은 1972년 삼중당에서 첫 출간된 『김찬삼의 세계여행』 시리즈로 결실을 맺었다. 이 시리즈는 총 6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륙별로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태평양’ 등을 다루고 있다. 각 권에는 김 교수의 직접 촬영한 수백 장의 흑백 사진과 컬러 화보가 함께 실려 있어, 독자들에게 당시의 현장감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여행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또한, 각국의 역사, 문화, 지리적 특성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과 통찰을 담아낸 이 책은 단순한 기행문을 넘어, 인문학적 교양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1970년대 후반에는 8권 구성본으로 일부 내용이 재구성되어 유통되었고, 1981년에는 삼중당에서 전 10권 완간본이 출간되었다. 완간본은 더욱 세부적이고 풍부한 내용으로 보강되었으며, 1987년에는 한국출판공사에서 개정, 증보판으로 재출간되어 새로운 편집과 최신 정보를 담았다. 특히 이 판본에는 김 교수의 여행지에서 찍은 컬러 화보들이 추가되어, 당시의 풍경과 문화를 시각적으로도 더욱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니콜라 부비에와 김찬삼 교수는 출발한 장소도, 동행의 유무도, 여행의 방식도 달랐지만, 비슷한 시기인 1950년대에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묘한 공통점이 있다.

한 사람은 스위스 알프스에서 출발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전쟁의 폐허 위 한국에서 떠났다. 그들의 여정은 서로 다른 길 위에서 시작되었지만, 세계를 향한 열린 시선과 삶을 꿰뚫는 사유라는 지점에서 어느 순간 조용히 맞닿는다.

어린 시절, 아버님 책장에는 삼성출판사의 국내와 해외 문학 전집과 백과 대사전, 그리고 삼중당에서 출간한 10권짜리 양장본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당시 선생님으로 재직하셨던 아버님은 자녀들의 교육을 생각하시며 이런 책들을 마련하셨을 것이다. 아마 학교로 종종 찾아오던 출판사 영업사원의 권유도 있었을 테지만, 결국 자녀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시고픈 마음으로 조용히 결심하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값은 분명 당시 선생님의 박봉 월급에서 매달 할부로 납부하셨을 것이고, 책장은 천천히 그런 결정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책장 속의 삼성출판사 국내 문학 전집에서 김동인의 감자, 현진건의 운수 좋은날,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 근대 한국 문학사에서 중심적인 작가들의 단편과 장편들, 그리고 세계문학 전집에서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도스트옙스키의 죄와벌, 앙드레지드의 좁은문 등을 아무 때나 꺼내 읽을 수 있었다.

때로는 두껍고 묵직했던 세계 백과 대사전과 김찬삼의 세계 여행기 중에서 컬러로 된 화보도 즐겨 보았다. 아직 가 보지 못한 나라들의 거리, 시장, 자연,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이 담긴 사진들은 매번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었다.

1993년, 삼성물산 건축 ENG팀 근무 시절, 팀 내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3개월 파견자를 지원받았을 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그 선택은 이후 23년간의 해외 근무로 이어졌고, 그 사이 67개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7개 나라에서의 해외 근무와 여행 등으로 머무른 도시, 스쳐 간 골목과 사람들. 그 모든 여정은 어릴 적 김찬삼의 여행기나 세계문학 전집 책 속에서 처음 만났던 세계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인터넷 중고 서점에서 1974년 7월에 발행된 6권짜리 《김찬삼의 세계여행》 초창기 전집 6권 중, 1권이 빈 2권부터 6권까지를 발견하고 즉시 구매를 신청했다. 퇴근 후 도착한 우체국 택배 상자를 열며 책을 꺼냈을 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이 밀려왔다.

일반 책보다 큰 크기인 B5(실제로 재어 보니 260mm x 190mm)사이즈에 하드카피로 된 겉표지는 낡아졌고 색도 바랬지만, 책장을 넘기자마자 마주한 사진들은 여전히 생생했다. 어렸을 적 보았던 건 10권짜리 완성본이라서 컬러 사진이 훨씬 많았던 기억이 났지만, 1970년대 초창기 인쇄본이라서 감회가 더 새로웠다. 몇십 년 만의 재회였다.

이때는 책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방식이었고, 글자배열도 옛날의 신문처럼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글씨 폰트 크기도 신문의 본문 글씨 폰트인 8~9포인트보다도 훨씬 작은 5~6포인트밖에 안 될 정도로 작아서 아마도 요즈음 책의 일반 폰트 크기인 10~11포인트로 변환하면 20권은 족히 될 정도이다.

박경리의 토지, 최명희의 혼불,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버금가는 여행기로서는 그야말로 대작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김찬삼의 세계 여행기 책은 단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조율하게 해 주었다.

진정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 이전에 가슴 속에 품는 동경, 그리고 돌아온 뒤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돌이켜보면, 세계를 향한 첫 동경, 그리고 수십 년간 이어진 여정의 출발점에는, 말없이 책장을 채워 주셨던 아버님의 손길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삶을 이끄는 가장 깊고도 소중한 선물임을, 이제야 진심으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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