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선구자들

by 박홍섭

여행의 선구자(先驅者)들


한국이 세계여행 자율화가 된 건 1989년부터이다.

남들이 해외로 잘 가지 않던 시절,

신혼여행을 대만으로 다녀온 이후로

전 직장에서 23년 동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UAE,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방글라데시 등의 나라에서 보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세계여행이 일상 중의 루틴이 되었고,

나이 숫자만큼 돌아보고자 했던 지구촌 여행은

65세가 된 지금까지 세계 68개국을 여행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새로운 여행지에 대해 준비하고,

다녀온 후에는 사진과 경험을 정리하며 기록을 남긴다.

이런 기록들은 단순한 추억으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

2023년과 2024년, 2025년 그간의 여행 이야기를 모아

세 권의 세계여행 에세이를 출간했다.


그렇게 여행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많은 이들과 경험과 감동을 나눌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면서

되도록이면 주변의 물건들을 버리는 걸 최우선으로 하면서

옷가지들, 신발, 가방 등도 용도별로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시간날 때마다 수거함이나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


전공 서적이며, 회사 생활하면서 생기는 자료나

관련 서적들 역시 모아 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독 여행과 관련된 물건들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 절판된 여행책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입해 모아 두고 있다.


여행하면서 주워 모은 마그네틱, 종, 열쇠고리 등도

아직은 보관 중이나, 이제는 더 이상 모아 둘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고민 중이다.


작년 말 석파정 미술관에서 천경자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그녀의 여행 에세이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책을

구입하고 싶었으나, 1986년도 책이라서 알라딘 등

중고 서적 사이트를 찾아보았으나 구할 수가 없다가,

최근에서야 구하게 되었다.


1986년 정가는 3,500원이었는데, 40년 지난 책의 가격은

1권은 20만원, 다른 1권은 10만원이라서 고민하다가

10만원에 구입했는데, 다행이 책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어려서 아버님이 사 놓으셨던 <김찬삼의 세계여행>시리즈도

그림책으로 즐겨 보던 책 중의 하나였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려서, 최근에 중고로 구입해서 책장에 채워 놓았다.

중고책으로 구입한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1974년에 발행되었다.


한비야의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여행책도 4권 중 일부는

최근에 중고책으로 구입했다.


김찬삼 교수, 천경자 화백, 한비야 여행가는

세계여행이 지금처럼 일상적인 선택이 되기 훨씬 이전에,

여행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항공권이 흔치 않던 시절, 정보가 거의 없던 시대에

낯선 세계를 향해 먼저 길을 냈던 선구자들이었다.


김찬삼 교수는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어린 시절 아버님이 사두셔서 집 책장에 꽂혀 있던

<김찬삼의 세계여행> 시리즈는

지금처럼 컬러 사진이 넘치던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그림과 글만으로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던 창이었다.


어려서 컬러 화보를 만화책 보듯 보았었고,

지금에서야 글씨를 읽어 보려 하니 포켙용 성경책처럼

활자체가 너무 작아 나중에 은퇴 후에 한가할 때

천천히 음미해 봐야 할 듯싶다.


1974년에 발행된 이 시리즈는 여행 정보서라기보다

‘세상은 넓고, 나가볼 가치는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건네는

조용한 선언문에 가까웠다.

그의 여행은 과시가 아니라 관찰이었고,

속도가 아니라 체류였다.


천경자의 여행 역시 또 다른 차원에 있었다.

그녀에게 여행은 이동이 아니라 내면의 진동이었다.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는 여행기라기보다

세계를 통과하며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기록들이다.


1986년에 출간된 이 책이 지금은

구하기조차 어려운 희귀본이 되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풍경을 소비하지 않고, 풍경에 스며들었던 천경자 화백은

여행지를 화폭에 담았고, 동시에 여행지에 자신을 남겼다.


한비야는

여행이 개인의 감동을 넘어

사회적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은

단순한 도보 여행기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읽어 내려간 기록이었다.


지도를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었던 여행.

그녀의 글을 읽으며 많은 이들이

‘여행은 체력보다 태도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여행이 유행이 되기 전에 이미 여행자였고,

여행이 콘텐츠가 되기 전에 이미 기록자였다.


국가 간 이동이 불편하고,

정보가 부족하며,

여행이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에도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떠났다.


그래서 그들의 여행책만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절판된 책에 웃돈을 얹어가며 다시 들이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정보 때문이 아니라,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여행의 태도와 용기를

함께 보관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행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열리기 이전에도

이미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었던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여행은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한국 여행사의 초반부를 써 내려간

진짜 여행의 덕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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