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2003년 개봉했던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매우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 있다.
주인공 주영작(황정민)의 부친 주창근(故 김인문)은 알콜중독인데, 진료실에 가족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의사 장운주(김병춘)가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 주창근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와서 술을 안 드신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건 아니에요, 아닌데!
지금 이 정도로 고통도 없이 나다니시는 거요, 큰 복이거든요?
아, 근데 거기다가 술 자꾸 드셔가지고 더 악화시킨다는 건, 글쎄요...
이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대사, "이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를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이 대사가 어울리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의 12대 국왕, 인종(仁宗, 1515~1545)이다.
인종 이호(李峼)는 1515년 2월 25일 중종(中宗)의 적장자(嫡長子)로 태어났다.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는 그를 낳고 열흘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5일 후인 11월 20일 왕위에 올랐으나,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545년 7월 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세.
인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칭찬 일색이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훌륭한 군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 하늘이 왕에게 큰 덕을 주어 이미 위(位)를 얻고 녹(祿)을 얻었으니 반드시 그 수(壽)도 얻었다면 장차 크게 유위(有爲)하였을 텐데 하늘의 참뜻을 믿기 어렵고 하늘의 명이 일정하지 않은 아픔이 이러한가.』 (《인종실록》 인종 대왕 묘지문)
『성품이 매우 고요하고 욕심이 적으며 인자하고 공손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실천이 독실하였으므로 동궁(東宮)에 있은 지 25년 동안에 어진 덕이 널리 알려졌다.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게 되어서는 중외가 지치(至治)를 기대했었는데, 상중(喪中)에 너무 슬퍼한 탓으로 갑자기 승하하게 되었고 또 뒤를 이을 아들도 없었으니, 애석하다.』 (《인종실록》 총서)
이런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나아가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죽음을 냉정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옥체를 돌보라도 권유했음에도, 사실상 그는 스스로 비극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우선 그에게 이 대사를 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실록의 기록대로, 인종이 중종의 사망 이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건강을 해쳤고, 이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슬프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죽어? 이게 말이 돼? 다른 이유가 있겠지, 설마...'
이런 의심 때문에 나온 것이 바로 문정왕후의 인종 독살설일 것이다.
문정왕후의 인종 독살설은 실록에는 나오지 않고 야사(野史)로 전하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정왕후는 평소 인종이 문안을 올 때마다 쌀쌀맞게 대하는 것도 모자라, "언제 나와 경원대군을 죽일 것이냐!"라고 막말을 하는 등 그를 매우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살갑게 대하며 떡을 권했다.
효자였던 인종은 문정왕후가 건넨 떡을 기쁘게 받아먹었는데, 여기에 독이 들어 있었고, 얼마 못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종실록》을 살펴보면, 문정왕후의 인종 독살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99.9%라고 볼 수 있다.
인종이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자.
『윤임이 드디어 재촉하여 들어가 살피게 하자, 윤인경 등이 들어가 절하고 부복하니, 상이 관대를 차리지 않고 대신을 만나기가 미안하다 하여 침상에서 내려 오려는 모습을 지었으나 기력이 다 되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억지로 윤흥인을 시켜 부축하게 하여 일어나서 이르기를, "경들은 내 기후를 보라." 하였다.
윤인경·유관이 손으로 우러러 어루만져 보니 여윈 뼈가 앙상하여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인종실록》 1545년 6월 29일)
위의 기록에서 인종의 몸 상태를 나타낸 표현들을 살펴보자.
'침상에서 내려 오려는 모습을 지었으나 기력이 다 되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여윈 뼈가 앙상하여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뼈가 앙상할 정도로 말랐으며, 기력이 없어 침대에서도 못 내려올 정도다?
이건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한 아사(餓死) 직전의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생각해 보자. 정상적인 사람이 며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해서 저 정도 상태가 되진 않는다.
그리고, 도대체 어떤 독이 사람을 죽이지 않은 채 저 지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이상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인종은 독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영양실조로 죽었다.
나의 이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하고 나설 것이다.
'왕이 영양실조로 죽어? 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그런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아니다.
중종이 죽던 날부터 실록에 뻔찔나게 나타나는 기록이 뭔지 아는가?
바로 인종이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기록이다.
『보덕 이약해 등이 김승보를 불러 동궁의 기거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기를, "된 죽이건 묽은 죽이건 전혀 들지 않으십니다마는, 기후는 평안하신 듯합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16일)
『홍언필 등이 승언 내관 등을 청하여 고하기를, "세자께서 죽도 전혀 드시지 않아 비록 여러번 청해도 끝내 따르지 않으신다 하니 신들의 근심을 이루 상달할 수 없습니다. 예부터 누군들 상을 당하지 않은 임금이 있었겠습니까? 모름지기 국가의 종묘와 사직을 염려하여 억지로라도 죽을 드시도록 간절히 상달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18일)
『사옹원 제조 윤임 등이 아뢰기를, "예문을 상고하니 ‘3일 후에 찬선(饌膳)을 든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성복(成服)한 뒤인데도 찬선을 드시지 않으니 인정과 예문에 모두 지나쳐서 신하들이 모두 민망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21일)
뭐, 이때까지는 그럭저럭 봐 줄만 하다. '아버지가 죽어서 정말 슬픈가 보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후에도 인종의 금식(禁食)과 관련된 놀라운 기록들이 이어진다.
『좌의정 윤인경과 좌찬성 성세창이 아뢰기를, "위에서 애통망극해 하는 정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대행 대왕(중종)께서 병환이 위독하실 때에도 곁에서 오래 모시느라 찬선을 드신 적이 없는데 대고(大故)를 당하여서는 애통해 하심이 예도에 지나쳐 이제까지 찬선을 드시지 않는다 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17일)
이미 중종이 죽은 지 두 달이 넘은 시점이었다. 인종은 이때까지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윤인경의 말에 따르면, 중종이 죽기 전부터 찬선을 들지 않았다고 했으니 실제로는 두 달도 훨씬 더 되었을 것이다.
그의 효심이 지극하다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건 정도를 벗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인종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두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건강이 나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홍문관 부제학 송세형 등이 아뢰기를, "위에서 애통해 하시는 것이 예제에 지나쳐 날로 더욱 수척하여지시므로 시신들이 우러르고 놀라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신들도 듣고서 근심스럽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23일)
『대사간 이윤경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보건대 전하께서는, 거룩한 자질을 타고 나셔서 지극한 성정과 순수한 효성으로 양암(諒陰)에 계시면서부터 극진한 슬픔이 예제(禮制)에 지나쳤으므로 기력이 지쳐 움직일 때에는 사람에게 부축을 받아야 하며 심폐와 비위의 두 맥도가 다 약하신데, 이것은 슬픔이 지나친 탓입니다."』 (《인종실록》 1545년 윤1월 10일)
이때 이미 인종의 건강은 움직일 때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 악화된 상태였다.
실록에는 이런 기록도 전한다.
『또 늘 측근 신하에게 말하기를 ‘음식을 조절하고 약을 먹으면 권제(權制)를 따르지 않더라도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권제를 따르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하였고,...』 (《인종실록》 1545년 7월 4일)
한 마디로, 인종은 끝까지 고깃국 및 찬선을 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수준의 금식을 수개월이나 지속하고도 살아날 사람은 없다.
나는 인종이 영양실조로 죽은 게 확실하다고 본다.
이제 또 많은 사람들이 반박하고 나설 것이다.
'네 말대로 인종이 밥을 안 먹어서 영양실조로 죽었다 치자. 그럼 문정왕후는 뭐 한 거야? 친아들 아니라고 너무 한거 아냐? 그리고 조정 대신들은? 왕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신하들은 뭘 했단 말이야?'
문정왕후와 대신들 역시 할 말이 있다. 손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단 얘기다.
1545년 1월 15일, 승정원에서 《예경(禮經)》의 말을 인종에게 바치며 권제를 따를 것을 청했다.
『정원이 《예경》에서 베껴 써서 아뢰기를, "이제 큰일이 있는 때를 당하여 옥체가 지나치게 손상되시니 조정 상하가 다 망극해 합니다. 바라건대 선왕의 알맞은 제도를 힘써 따르시어 찬선을 들고 조리하소서. 이것은 《예경》의 말로 위에서 평소 강론하시던 것입니다마는, 경황 없는 중에 어찌 다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껴 써서 들이니 위에서는 이것을 살펴 슬픈 정을 조금 억제하소서."』 (《인종실록》 1545년 1월 15일)
이틀 후인 1월 17일, 이번에는 좌의정 윤인경과 좌찬성 성세창이 인종에게 '밥 좀 먹어라'라고 권했다.
『"제왕의 효도는 여느 사람과 다르고 또 예문(禮文)에도 ‘애통해 하여 수척한 것이 중도에 지나친 것은 군자가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어진 사람은 감히 중도에 지나치지 않게 하고 불초한 자는 중도에 미치게 하여 예문에 맞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큰 효도이니 종사(宗社)의 대계를 위하여 애써 찬선을 드소서. 신들의 뜻만이 이런 것이 아니라 온 조정의 뜻이 다 그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별로 예도에 지나치게 한 일이 없는데 이제 아뢴 사연을 들으니 매우 부끄러움을 느낀다. 마땅히 생각하여 부응할 수 있게 하겠다." 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17일)
분명 알겠다고 답해놓고도 인종이 계속 식사를 들지 않자, 4일 후에 윤인경 등이 다시 식사를 권했다.
이때, 윤인경 등은 문정왕후에게도 인종에게 식사를 권할 것을 요청했다.
『윤인경 등이 또 대비에게 아뢰기를, "듣건대 주상께서 애통해 하여 수척한 것이 도에 지나쳐 기운이 아주 쇠약하시다 합니다. 신들이 아뢰지 않더라도 위에서 옥체를 보호하시는 데에 그 방도를 극진하게 하실 것이지만 발인(發引)할 날짜가 촉박한데 조금이라도 편찮으신 데가 있으면 일이 더욱 당혹스럽게 될 것이니, 찬선을 드시도록 권하여 반드시 옥체의 강녕을 보전하게 하소서. 상전의 말씀은 위에서도 반드시 들으실 것입니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21일)
대신들의 요청에 문정왕후의 대답은 이러했다.
『대비가 답하기를, "나도 매번 사람을 시켜 찬선을 권하고 드시는 음식이 있으면 가져오게 하여 살펴 보는 등 매양 유념하고 있다. 지난번 감기로 말미암아 자못 기침기가 있으므로 곡전(哭奠)을 거행하지 말도록 청하였으나 거행하여 마지않으니, 나도 민망하고 염려스럽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21일)
대신들의 생각과 달리 인종은 문정왕후의 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문정왕후가 "나도 민망하고 염려스럽다."라고 했을까? 인종이 그녀의 말을 무시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얘기다.
인종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지던 1545년 윤 1월, 문정왕후의 지시로 인종에 대한 진찰이 이뤄졌다.
진찰을 통해 '병이 있으니 권제를 따르라'고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
『의원이 들어가 진찰하니, 심폐(心肺)와 비위(脾胃)의 맥이 미약하고 입술이 마르고 낯빛이 수척하며 때때로 가는 기침을 하였다.
정부 및 육조·한성부가 아뢰기를, "상의 옥체가 매우 피곤하고 비위가 미약하십니다. 세종의 유교에 ‘병이 깊어지기 전에 미리 막아야 한다. 병이 깊어진 뒤에는 권제를 따르려 하여도 할 수가 없게 된다.’ 하셨습니다. 세종 대왕께서 종사의 대계를 위하여 범연하게 생각하여서 권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니 억지로나마 따르셔야 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인종실록》 1545년 윤1월 9일)
그러던 중, 내시 박한종이 홍언필에게 인종이 초상 이후 지금까지 전혀 고깃국 및 찬선을 들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내시 박한종이 홍언필에게 ‘위에서 초상 때부터 전혀 염장을 들지 않으므로 내시들이 혹 들도록 권하면 위에서는 숟가락을 입에 가까이 대고는 내가 먹고 있지 않느냐고 하였으나 역시 들지 않는다.’ 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7일)
박한종의 말에 결국 1545년 2월 11일, 문정왕후와 대신들의 '인종 고깃국 먹이기 대작전'이 시행되었다.
『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신들은 전하께서 바야흐로 지나치게 수척하여 위태하고 괴로운 처지에 계신 것을 보고도 윤허받지 못하였으므로 의리상 물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미 나타난 병을 살피시어 뒷날의 후회가 되지 말도록 사람들의 뜻을 쾌히 따라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또 이제 듣건대 자전께서 친림(親臨)하여 고깃국을 권하려 하신다 하니, 자전의 분부는 더욱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11일)
대신들의 말처럼 문정왕후가 직접 인종을 찾아가 고깃국을 권했고, 이에 인종이 권제를 따르겠다고 답했다.
『자전이 대신 등에게 하교하기를, "오늘 내가 친히 가서 간절히 권하여 허락받았으니 조정에서는 이를 알라." 하였다.
대신 등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분부를 듣고 그지없이 감격하여 눈물이 납니다."하니,
답하기를, "오늘 가서 허락을 받았으니 나도 감격스럽고 위안이 된다." 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11일)
그러나 문정왕후와 대신들에게 약속한 바와 달리, 인종은 결국 권제를 따르지 않았다.
실록의 기록 그대로, '겉으로는 애써 따르겠다 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았다.'
『또 사신은 논한다. 상의 성효는 타고난 천성이다. 약시중을 들 때부터 상심이 이미 극진하였고, 여차(廬次)에 있는 뒤로는 애통해 하여 수척한 것이 예도에 지나쳐 옥체가 쇠약해졌으므로 중외가 몹시 염려하였다.
대신이 권제를 따르도록 굳게 청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극간(極諫)하기에 이르자, 겉으로는 애써 따르겠다 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았으니, 그 효성이 또한 지극하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11일)
1545년 2월 21일은 중종의 졸곡제(卒哭祭)가 치러진 날이었다.
『상이 졸곡제를 친행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21일)
3일 후,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종재(宗宰) 1품 이상과 승정원·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전수가 부름을 받고 합문 밖에 나아가니, 상이 윤인경 등에게 전교하기를, "자전과 온 조정이 나에게 권제를 따르도록 권하므로 내가 이미 애써 따랐거니와, 나는 조정도 개소(開素)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제 모이게 한 것이다." 하였다.
윤인경 등이 사례하고 이어서 내시 박한종에게 말하기를, "위에서 참으로 권제를 따르시는지를 잘 모르고서 신들이 개소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박한종이 말하기를, "오늘 아침부터 수라를 드십니다." 하였다.
좌의정 유관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의심이 없겠다." 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24일)
인종의 말을 쉽게 풀어보자면, '내가 이미 문정왕후와 너희들의 말을 따라 고기를 먹고 있었다. 이제 졸곡제를 치렀으니 너희들도 고기를 먹도록 해라.'쯤 되겠다.
그 말에 윤인경 등이 의심을 품었다. 당연하다. 그동안 인종이 권제를 따르고 있지 않았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내시 박한종이 인종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답하니, 신하들도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내시 박한종은 2월 7일 홍언필에게 인종이 고깃국을 먹지 않는다고 알려 이 사태를 촉발시켰던 장본인이었기에, 대신들이 그의 말을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박한종의 말 역시 거짓이었다. 인종은 그 후로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졸곡이 되어 조정이 권제를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청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실은 실행하지 않았다.』 (《인종실록》 1545년 7월 1일)
2월 24일의 이 해프닝에 대해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사신은 논한다. 오늘의 일은, 대신이 들어가 천안(天顔)을 대하여 위에서 고기를 드는 것을 본 뒤에 물러나와 먹었어야 옳았다. 그렇지 않으면 위의 명이 있더라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는데, 이제 내시의 말만 듣고 스스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태연하게 행례(行禮)하였으니, 대신의 잘못이 진실로 크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24일)
한마디로, '대신들 눈으로 직접 왕이 고깃국을 먹는 걸 확인했어야지. 그렇지 못했으니, 너희들 잘못'이라는 뜻이다.
난 사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계속 권제를 따르고 있다고 거짓말한 인종이 잘못한 거지, 이게 왜 대신들 잘못인가?
저 정도 했으면 문정왕후와 대신들은 할 만큼 했다. 뭘 어떻게 더 하란 말인가?
문정왕후와 대신들이 빙 둘러앉아서 인종이 정말 고깃국을 먹는지 확인한다?
인종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인가? 이미 나이가 31살이다. 이보다 더 우스운 상황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대신들에게는 다른 사정도 있었다.
앞서 신립의 글에서 썼던 조세호의 '프로불참러' 대화를 다시 빌려오도록 하겠다.
(사람들) "왕이 영양실조로 죽을 때까지 너희들은 뭐 한 거야? 강제로라도 먹였어야지."
(대신들) "왕이 만나주질 않는데 무슨 수로 먹여요."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대신들이 왕을 만나지 못했다고?
그런데 실제로 그랬다.
인종은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 국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