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2)

by Loxias

* '히키코모리' 국왕, 인종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는 다음의 뜻을 지닌다.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 또는 그런 현상.

이와 비슷한 표현이 '은둔형 외톨이' 정도 될 것이다.


내가 인종을 '히키코모리'라고 한 것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내참, 어이가 없네. 국왕이 히키코모리라고? 이 녀석 관심 끌려고 별소리를 다하는군.'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봐왔던 조선 국왕과 대신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이렇기 때문이다.


대전이나 편전에 모여 왕이 무슨 얘기를 하면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니 되옵니다." 또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외친다.

한편, 왕이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면 이번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친다.

임금의 과외수업인 경연(經筵)은 어떤가?

왕이 신하들과 둘러앉아 경전을 읽고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기도 하며,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즉, 우리들이 생각하는 조선 국왕과 신료들의 만남은 항상 대면, 즉 'in-person'이다.


그런데, 《인종실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종의 이상한 행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1545년 1월 15일, 승정원이 《예경(禮經)》의 말을 써서 인종에게 바치며 권제를 따르라 청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금식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그때 승정원에서 인종에게 올린 글에서 수상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근래 바깥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위에서 전혀 찬선(饌膳)을 드시지 않아 애통으로 인한 수척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는데, 신들이 지난번 삭망전(朔望奠) 때 보건대, 위에서 잘 걷지도 못하고 옥색(玉色)도 전만 못하셨습니다. 신들이 목도한 바로는 바깥의 말이 헛되지 않은 듯하여 슬프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15일)


기록의 뉘앙스상, 승정원의 신료들이 인종을 직접 만나 보고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눈치챈 게 아니라, 중종의 삭망전을 지내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게 뭐가 문제냐고?

자, 승정원이 어떤 곳인가? 현대로 치자면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왕 비서들이 이랬다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다른 기록을 보자.

『좌의정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신은 밖에 있으므로 천안(天顔)을 우러르지 못하였으나 보름날 배제(陪祭)할 때에 시종(侍從)들이 ‘상의 옥체가 매우 쇠약하여 걸음도 전만 못하다.’ 하기에, 놀랍고 염려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21일)

윤인경 역시 천안, 즉 인종의 얼굴을 직접 본 게 아니라 시종들로부터 들었다고 되어 있다.


승정원이나 좌의정이 직접 임금의 얼굴을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먼발치에서 보거나 시종들로부터 전해 들어서 몸 상태를 파악했다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때 사정이 있어서 얼마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거겠지. 그런 걸 가지고 '히키코모리'니 뭐니 하는 거냐. 참나원.'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인종이 계속 권제를 따르겠다고 말만 할 뿐 실제로는 고깃국을 먹지 않아 몸 상태가 계속 악화되자 결국 문정왕후와 대신들이 나서 '인종 고깃국 먹이기 대작전'을 벌였던 게 2월 11일이었다.

이날 문정왕후가 대신들의 요청에 따라 직접 인종을 찾았고, 이에 그는 권제를 따르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인종의 행태를 익히 알고 있던 조정 신료들은 도무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인종이 정말 권제를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종에게 '얼굴 좀 보여달라'고 청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아뢰기를, "전교는 번번이 이러하시더라도 드신 사실이 없습니다. 백방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다른 약은 보탬이 없으니 빨리 권제를 따르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정의(情意)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들어가 면대하여 친히 찬선을 살피게 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면대하지 않더라도 이미 따르고 있다." 하였는데, 윤인경 등이 드디어 물러갔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12일)

인종은 대신들의 면대 요청을 거절했다.


이틀 후, 홍문관이 올린 차자에서 매우 놀라운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성후(聖候)가 미령하신 지 이제 이미 누순(累旬)이 되었고 말품인 의관도 출입할 수 있는데 묘당(廟堂)의 대신은 한 번도 나아가 뵙지 못하였으니, 원수와 고굉이 서로 친숙하다는 의의를 극진히 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이미 경중의 권형을 잃어서 서로 막히는 형세가 이루어졌으므로 심지어 고락을 같이 하는 지친(至親)이 합문을 두드리며 면대를 청하여도 한 번도 접견을 허락하시지 않으니, 친족을 친근히 하는 도리에도 미진한 데가 있는 듯합니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14일)


홍문관의 차자에서 다음 대목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묘당의 대신은 한 번도 나아가 뵙지 못하였으니', '지친이 합문을 두드리며 면대를 청하여도 한 번도 접견을 허락하시지 않으니'라는 대목.

말 그대로 인종이 대신이고 종친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승정원이나 윤인경 등이 말을 꺼냈던 1월 그 당시에만 그랬던 게 아니었단 얘기다.


다음 기록도 살펴보자.

『익양군 이회가 여러 종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어제 위에서 권제를 따르겠다고 전교하셨으나 신들은 그 실행이 없으실까 염려됩니다. 졸곡이 이미 지났고 위의 육맥이 허약하신데 이제 고기를 드시지 않으면 약으로는 고칠 수 없으니 들어가 면대하여 그 실상을 알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사실대로 답하였는데도 이토록 믿지 않으니 매우 미안하다." 하였다.

회(懷) 등이 모두 세 번 아뢰었는데 전교하기를, "다시 효유할 말이 없다." 하니, 드디어 물러갔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22일)

문 앞까지 와서 면대를 요청하는 왕실 친척들을 끝내 거부하는 모습이다.


한 달 후에는 이런 기록도 등장한다.

『대간이 아뢰기를, "즉위하신 뒤에 한 번도 시사(視事,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이야기하는 것)하지 않으셨으므로 상하가 막혀서 사람들의 심정이 답답해 합니다...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어긋난 다음에 하늘의 재앙이 위에서 응하는 것이므로 신하들을 접견하여 면대해서 재앙이 오게 된 까닭을 논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도리를 강구해야 할 것이니, 빨리 시사하소서."』 (《인종실록》 1545년 3월 20일)


인종이 즉위한 이후 조정 신료들과 함께 나랏일을 논의한 적이 없다는 얘기로, 사태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단지 인종의 건강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인종이 대소신료들과 국정을 논하지 않고 국사를 처리하지 않으니,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때를 봐서 하겠다고만 할 뿐, 조정 대신들을 만나지 않았다.

『답하기를, "근래 오래 시사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염려하고 있었으나 부득이한 형세이므로 하지 못하였는데, 가까운 날에 참작하여 하도록 하겠다."』 (《인종실록》 1545년 3월 20일)


이후에도 대신들이 인종에게 면대를 요청하고, 인종은 거절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좌의정 유관, 우의정 성세창, 병조 판서 이기, 예조 참판 정만종, 대사헌 송인수, 동지중추부사 정유선, 예조 참의 김익수, 병조 참지 이임 등이 문안하고, 유관·성세창이 이어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지금 국상을 당한 때에 성체를 보호하는 책임이 실로 상신(相臣)에게 있으므로 신들이 면대하고자 한 지 오래 되었으나 명을 받지 못하였으니 임금과 신하의 정의(情義)가 서로 막힌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습니다."

답하기를, "또 임금과 신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은 참으로 내 마음을 감동시킨다마는, 처소가 불편하므로 곧 인견(引見)하지 못한다."』 (《인종실록》 1545년 4월 27일)


인종이 죽기 5일 전에도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영의정 윤인경이 이어서 아뢰기를, "의원에게만 들어가 상의 기후를 진찰하게 하고 신들은 한 번도 들어가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더욱 답답하고 염려됩니다. 오늘 박세거가 들어가 진찰할 때에 신들도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서너 사람은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도 보고 싶은 지 오래다. 다만 병이 나고 처소도 또한 불편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할 듯하다. 며칠 지나서 기후가 어떠한지 다시 살펴서 조용히 인견하겠으니 지금은 들어올 것이 없다." 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6월 26일)


처음에는 인종을 향한 대신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종실록》에는 '정부(政府)가 아뢰기를,' '윤인경이 말하기를,' '조강에 나아가다' 등의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갖고 있는 인식대로라면, 조정 신료들이 인종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기록을 보고 나서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성삼문이 다시 아뢰기를, "경연은 조정과 견줄 바가 아니므로 간혹 때때로 특별히 우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사다(賜茶)·사좌(賜坐)의 예(禮)가 있었습니다. 신이 지난해부터 간혹 하루나 이틀 걸러서 매양 들어가 진강하였으나, 용안을 우러러 뵈올 수 없었으니, 청컨대 고례(古例)에 의하여 사좌하소서."』 (《단종실록》 1453년 11월 14일)

성삼문의 말에서 국왕이 경연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 즉 비대면 경연도 이뤄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들이 인종에게 아뢰고, 그가 이에 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직접 얼굴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종실록》을 보면, 왕이 실제로 대신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다음의 표현이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견(引見)하였다.' 또는 '면대하였다.'


『박수문·김정국 등이 다시 면대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매, 아뢰기를,... 하고 물러갔다.』 (《중종실록》 1517년 10월 21일)

『상이 삼공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중종실록》 1517년 1월 8일)

『전교하였다. "정부, 양사(兩司), 홍문관의 전원을 부르라. 면대하여 의논하겠다."』 (《중종실록》 1532년 3월 1일)


그러니까 결국 《인종실록》에 등장하는 대신들이 인종에게 했다는 말, 이에 대해 그가 전교했다는 말, 경연에서 나눴던 내용 등 모든 것들이 비대면으로 이뤄졌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이걸 깨닫고 나면 인종이 죽기 전날의 기록이 이해가 된다.

『윤임이 드디어 재촉하여 들어가 살피게 하자, 윤인경 등이 들어가 절하고 부복하니, 상이 관대를 차리지 않고 대신을 만나기가 미안하다 하여 침상에서 내려 오려는 모습을 지었으나 기력이 다 되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억지로 윤흥인을 시켜 부축하게 하여 일어나서 이르기를, "경들은 내 기후를 보라." 하였다. 윤인경·유관이 손으로 우러러 어루만져 보니 여윈 뼈가 앙상하여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인종실록》 1545년 6월 29일)


윤인경과 유관은 인종이 죽기 전날에서야 그를 제대로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그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자 놀라움과 안타까움, 미안함에 눈물을 쏟아냈던 것이리라.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윤인경과 유관은 정승이었다.

정승들도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인종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려왔고, 실제로도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종이 사망한 후 작성된 그의 묘지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그의 모습이 사실이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갑진년 가을에 중종께서 오랜 근심 걱정 끝에 자주 병환이 나셨는데, 왕이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고 잠을 편히 주무시지 못하셨다. 병환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위독하게 되어서는 옷을 벗은 적이 없고 음식을 들지 않으니, 수척한 형용은 보는 자가 울먹였다...

훙서(薨逝)하시게 되어서는 미음까지 전연 드시지 않은 것이 엿새이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으신 것이 다섯 달이었으며 죽만을 마시고 염장(鹽醬)을 드시지 않았다.

장사지내고 나서는 늘 상차(喪次)에 계셨는데, 궁인을 물리치시어 모시는 자는 다만 소환(小宦) 두어 사람뿐이었다. 비록 세대는 달라져서 양암(亮陰)에서도 명계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 군국의 일을 모두 대신에게 위임하였고, 혹 말하면 부드러우셨다.

왕은 초상 때부터 수척한 것이 이미 극도에 이르러 병환이 날로 더하여 갔는데, 대신이 예문(禮文)대로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는다.’는 제도를 따르도록 청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고,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청한 것이 여러 날이었으나 역시 들어 주지 않으셨다. 모비(문정왕후)께서 친히 권하시니, 왕이 마지못하여 드실 듯하였으나 끝내 들지 않으셨다.』 (《인종실록》 인종대왕 묘지문)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 인종은 중종이 위독했을 때부터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으며, 중종이 죽고 나서 6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그 후로도 죽만 마시고 염장, 즉 고기는 일체 먹지 않았다.

온 조정뿐만 아니라 문정왕후까지 나서서 권제를 따를 것을 청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결국 사망했다.

상차, 즉 빈소에 처박혀 어린 환관 두어 명만 두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히키코모리'적 행태를 보였으며, 나랏일을 모두 대신에게 위임했다.


자, 지금까지 살펴본 《인종실록》의 믿기지 않는 기록들을 본 소감이 어떠한가?

인종이 영양실조로 죽었으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히키코모리'였다는 나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나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이런 의문이 떠오르지 않는가?


'하아... 알겠는데, 그럼 인종은 도대체 왜 저런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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